[화요초대석] 우리가 잃어가는 것

입력 2023-01-16 09:38:57 수정 2023-01-16 15:21:52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주러시아 대사)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전 주러시아 대사)

몇 해 전 '국제시장' 영화가 나와 사회가 떠들썩할 때였다. 전쟁 중 북에서 내려온 선배께 그 영화를 본 소감을 물었다. "그런 것 봐서 뭐해요? 내가 직접 겪은 게 훨씬 더했는데." 그분의 대답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우리가 잃어 버린 무엇인가가 아직도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북한 간호학교 학생으로 우리 군에 차출되었다가 갑작스레 철수하는 해군 함정에 몸을 싣게 되었던 젊은 여성 둘이 내린 곳은 피난민으로 우글거리던 부산이었다. 어둠이 덮여 가는 생판 외지에서 당장 밤을 지낼 곳이 없었던 그들은 첫 번째 불빛이 보이는 문을 두들겼다. 사연을 들은 구멍가게 주인 여자는 자기 집에는 누울 곳이 없지만, 이웃에 알아볼 곳이 있다며 어린 아들을 보냈다. 새로 안내된 집은 혼자 된 며느리가 두 칸 방에서 아이 둘과 함께 시아버지를 모시던 처지라 애들을 할아버지 방으로 보내며 북한 손님 둘이 누울 자리를 겨우 만들었다.

지금도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와 배려에 기초한 이런 친절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끊임없이 민족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해 왔지만, 그 많은 탈북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집으로 초청해 본 국민이 얼마나 있을까? 외국인 난민이나 노동자들에 대해 우리가 배타적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우리가 절대 가난과 전쟁의 포화에서 벗어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외세의 압박이나 기근과 질병의 위협, 그리고 국제 전쟁으로 확대된 동족상잔의 참화 속에서도 그나마 피해가 그 정도에 머물렀던 것은 동족끼리 총질하는 비극에 휘말리면서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모두 다 같은 인간이라는 자각과 상호 신뢰와 상부상조 의지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우리 가족의 경우만 해도 동두천까지 끌려가셨던 아버지가 미군의 폭격을 틈타 대열에서 이탈해 서울 집으로 돌아와 9·27 서울 탈환 때까지 한 달 가까이 숨어 지내셨다. 날마다 가택 수색이 있었는데도 발각되지 않았으니 기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요행이 낳은 기적이기보다는 인간성 승리의 결과라고 나는 본다. 숨어 계신 것을 알고 있던 옆집 반장 아주머니는 가택 수색이 자기 집에서 시작되면 신호를 보내 아버지가 숨을 시간을 만들어 주셨고 인민위원회 지령에 따라 수색을 하던 동네 아저씨들도 집을 뒤지는 척만 했지 악착스럽지 않았다. 상사의 눈치만 보지 않고 이웃에 대한 후의를 베풂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안전이 위협당하는 모험을 한 것이다.

그 엄혹했던 공산군 점령 치하에서도 동네 인민위원들이나 그 밖의 권력자들의 인품 여부에 따라, 또는 그들에게 당하는 우리 측의 상호 배려와 협조 여부에 따라 개인들의 생사가 갈리는 사례는 참으로 많았다. 목사나 교사들의 경우 교인이나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가 공산당에 협조하는 척 도덕적 부담을 감수하는 경우가 흔했고 그것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지도자들이 흔히 쓰던 수법이었다. 세계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심한 박해를 받고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는 멸종 작전의 대상까지 되었던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강력한 동족의식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그들이 서로를 돕고 지키려 나선 덕분이었음은 우리만 잘 모르고 있는 듯한 역사적 사실이다.

사람들이 극심한 위험에 처하면 야수로 변하는 일이 흔히 벌어지고 인간 사회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산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예전의 우리 한국에서는 사람으로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통된 의식이 경제와 민주주의가 훨씬 발달한 지금보다 더 강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추상적 이념이나 기회주의적 이권 계산에 사로잡혀 상대방도 자기와 똑같이 이성과 감정을 갖고 있는 영적 존재임을 잊고 공인들까지도 생떼를 쓰며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현상이 결코 지금처럼 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만을 보나 지구촌 전체를 보나 인간이 겪어야 하는 수난은 가중되면 가중되지 가벼워질 것 같지는 않다. 크게 보면 인간의 오만으로 삶의 보금자리가 파괴되었기 때문이고, 작게 보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 간, 모든 집단 간, 개개인 간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최상의 대책과 마지막 안식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 인정과 배려, 곧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보며 공조할 수 있는 능력인데 우리는 바로 그것부터 잃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매우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