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 수필가(미니픽션작가)
공터를 둘러싼 잡목숲에도 초겨울이 찾아들었다. 지난밤엔 비가 제법 내리더니 웅덩이마다 물이 흥건하다. 나는 익히 해 온 것처럼 베란다 창문을 열고 어떤 풍경을 훔친다. 그러니까 노인들이 야트막한 동산이었던 그 터에 간이 살림을 꾸린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얼추 세 해쯤 되었을까. 아파트 후문을 벗어나면 세 갈래 길이 나 있었다. 언덕을 내려 성당으로 가는 길과 묵정밭 사잇길을 따라 암자로 가는 길, 근린공원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어느 날 땅 주인이 암자와 성당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자연스레 삼각지가 만들어지면서 공터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왜 비어있는 꼬락서니를 그대로 두지 못할까. 정원수 가지치기를 한 나뭇가지며 깨진 화분과 온갖 생활 쓰레기가 쏟아졌다. 절름발이에 빛바랜 의자. 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낡고 삐걱거리는 의자들이 나날이 늘어갔다. 농짝이 나오고 거적때기가 깔린다. 용케도 의자가 늘어가자 조그마한 공터에 불과함에도 쓰레기장을 중심으로 노인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삐걱거리는 의자는 불안을 안고 있다. 불안감을 안더라도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게다. 흔한 문짝도 가벽도 울타리도 없는 곳. 그야말로 한데가 아닌가. 딱히 정해진 시간도 법칙도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와서는 시간을 보낸다. 바람도 햇살도 걸리지 않는 곳에 그들만의 기착지를 만든 셈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공터는 없다는 듯 식전 댓바람도 좋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답도 좋다.
유난히 광대뼈가 도드라진 김 노인은 웅덩이 고인 물에 흙 묻은 장화를 씻고는 한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텃밭에 다녀오던 팥죽색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배춧잎 같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노모차에 물통을 싣고 가던 노인이 방향을 튼다. 감색 털모자를 쓴 노파의 눈길은 강 건너 은행나무숲에 머문다. 허리 굽은 이는 잡목숲에 한약 재료 찌꺼기를 쏟아붓고 돌아서다가 틈바구니에 앉았다. 공공근로를 마친 이들까지 합세했다. 앉을 자리가 부족했을까. 마른 나뭇단에 걸터앉고, 고무통을 눌러놓은 벽돌을 치우고 앉았다. 간밤에 제사를 모셨는지 떡이 오가고 막걸리 종발이 오간다. 깻단을 두들기던 백발 성성한 노인이 일을 끝내고 두리번거린다. 그러고 보니 냇가 돌 닳듯 닳은 노인은 외로 틀어 앉은 날이 잦더니 뜸하다. 초전댁은 무릎 수술을 하러 가고 덕곡댁은 치매가 심해 요양원으로 떠났다. 거창댁은 이사를 오고 산청댁은 먼 길을 떠났다.
이제 한파가 찾아오면 공터에 둥지를 틀었던 그네들도 꽤 길게 동안거에 들 것이다. 생이 길어질수록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의 가짓수가 늘어간다고 했던가. 채전밭 한 귀퉁이 살구나무 환해지는 날, 또 감자 씨눈을 따고 분꽃 늘어지는 여름이면 무성하게 뻗은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길 노인들. 솎은 열무를 다듬고 모과를 썰어 말릴 것도 안다. 절뚝거리며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모인 생들.
겨울 지나 봄 지나고 여름 끝자락이면 키 작은 노인은 여전히 분꽃 씨앗을 받을 것이다. 잡목숲 싸리나무에 배춧잎 말라가고 느릅나무에 무청 말라가는 어느 하루. 어떤 풍경.
(어떤 풍경 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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