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언 문화체육부 기자
"콩그레츄레이션, 재팬!"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와중에 외신 기자들의 뜬금없는 축하 세례가 쏟아졌다. 지난 2일 카타르 도하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 스페인의 카타르 월드컵 E조 최종전 취재를 마치고 미디어 셔틀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기자를 일본 취재진으로 착각한 듯했다.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칠 수도 있었지만, 달갑지 않았다.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독일과 스페인을 차례로 무찌르고 조 1위로 16강에 오른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선전에 우려와 걱정의 마음이 앞섰다. 바로 다음 날 열릴 한국과 포르투갈의 H조 최종전 때문이었다.
16강 진출 여부가 갈릴 마지막 경기. 굳이 따지자면 당시의 무게는 한국의 조별리그 탈락에 쏠려 있었다. 한국이 조 3위로 가까스로 강호 포르투갈을 잡는다고 해도 비좁은 '경우의 수'를 넘어야 했다. 외신은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이 고작 9%라고 보도했다. 카타르로 파견된 다른 국내 취재진조차도 대부분 한국의 16강 진출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분위기였다.
'가위바위보라도 져서는 안 된다'는 게 한일전이랬던가. 비록 직접 승부는 아니었지만, 일본은 16강 진출에 성공하고 한국은 탈락하는 모습만큼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초조함은 포르투갈전이 시작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경기장의 공기가 평소와 달리 무거운 것 같았다.
두 팀의 대결은 예상보다 훨씬 팽팽했다. 전반전에 터진 포르투갈 히카르두 오르타의 선제골과 김영권의 동점골 이후 1대 1의 균형은 후반전 내내 깨지지 않았다.
마지막 추가시간, 주장 손흥민이 역습 기회를 잡고 빠르게 치고 달렸다. 수비수들의 관심이 모두 손흥민에게 쏠린 순간, 그는 슈팅이 아닌, 쇄도하던 황희찬에게 패스를 찔렀다. 이어진 황희찬의 깔끔한 오른발 슈팅이 포르투갈의 골망을 갈랐다.
순간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선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붉은악마들의 함성이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 안을 가득 메웠다. 기자석에 앉은 기자들도 기쁨을 주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을 응원하는 이들은 그 찰나에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고양감과 일체감을 느꼈다.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현장에 서 있다는 감각도 선명했다.
이어 우루과이-가나전이 우루과이의 2대 0 승리로 끝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국이 세계인의 예측을 멋지게 무너트린 순간이었다. '언더독의 반란'은 만국 공통으로 매력적인 서사다. 숙소로 돌아가면서 만난 외국인들 중에선 한국의 승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코리아!"를 외치거나 '따봉'을 날리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어깨가 쫙 펴지는 기분이었다. 전날의 사건이 떠오르면서 태극 전사들의 선전이 새삼 고마웠다.
돌이켜보면 한국에 있어 이번 월드컵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일의 연속이었다. 대회 직전 안와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고도 마스크를 쓰고 풀타임을 뛴 손흥민이 그랬고, 오랜 시간 파울루 벤투 감독의 외면을 받았지만 결국 월드컵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이강인이 그랬다.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못 밟다가 포르투갈과의 최종전에 교체 투입돼 나온 황희찬의 역전골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의 강팀을 상대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운 태극 전사들은 승패를 떠나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퍼트렸다. 불굴의 정신이 앞으로도 이어져 지금의 감동과 교훈을 4년 뒤, 8년 뒤에도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경선 일정 완주한 이철우 경북도지사, '국가 지도자급' 존재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