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우리 정치에 희망은 있는가

입력 2022-12-06 19:52:54

김수용 뉴스국 부국장
김수용 뉴스국 부국장

우리나라 정치는 왜 이런 꼴일까.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이태원 참사나 화물연대 파업만 봐도, 모든 것을 정치적 잣대로 헤집어 놓으려는 무모한 시도가 얼마나 국민을 힘들게 만드는지 알 수 있다. 모든 주제는 정치라는 괴물이 집어삼켜서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정치 괴물의 머리에는 딱 하나의 생각(그것을 생각이라고 부르기도 아깝지만)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분법이다. 거창하게 이름 붙이기는 했지만 쉽게 말해 '나는 옳고 선하지만, 너는 틀렸고 악하다'는 것이다. 여당이 야당이 되고, 그 반대가 돼도 똑같다. 입장만 바뀌었을 뿐 상대를 대하는 태도는 지고지순할 정도로 변함없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이다.

이들의 머릿속엔 '민주주의'라는 절대 선(善)을 통해 탄생한 권력은 그 자체로서 선하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물론 이런 가정은 출발부터 틀렸다. 우선 민주주의는 결코 절대 선이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빌려 벌어지는 독재와 거기서 잉태되는 무자비한 탄압의 사례를 먼 나라에서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시키느냐에 따라 최선의 정치가 될 수도, 최악의 통치가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그나마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규칙 중 하나일 뿐이다. 이를 통해 승리했다고 해서, 즉 국민의 지지를 조금 더 받았다고 해서 그 승자가 옳은 편에 서서 선한 판단을 내릴 지위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적 선거는 옳고 선함을 판단해 승패를 결정짓는 게임의 규칙이 아니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선거에서 이기면 마치 '내가 옳았다'는 식으로 해석해 버린다. 즉 상대는 틀렸고 악하다는 얼토당토않은 판단이 스멀스멀 뇌 한구석에 자리 잡는 것이다. 그러니 집권당은 한결같이 다음 선거에서 행여 정권이 바뀌더라도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제도를 만들려고 시도하거나, 아예 앞으로 100년 동안 계속 집권하겠다는 망언도 내뱉는 것이다.

1962년 첫 출간된 영국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의 책 '정치를 옹호함'(In Defence of Politics)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성공한 정치인은 권력을 획득한 후에도 자신이 받았던 모욕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그에게 수많은 비열한 의혹을 제기한 상대를 원칙적으로 따져 가며 대응하거나 불경죄로 다루는 사적인 보복을 하지도 않는다."

책 내용에 따르자면 아직 대한민국에 성공한 정치인은 없는 듯하다. 없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까닭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에 따라서 '이 사람만큼은 옳고 선했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론에서 "인간은 완성됐을 때는 가장 훌륭한 동물이지만, 법과 정의에서 이탈했을 때는 가장 사악한 동물이다. 무장한 불의(不義)는 가장 다루기 어렵다"고 했다. 민주주의와 선거를 절대 선처럼 규정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부여받은 자신도 선하다고 여기는 '무장한 불의'는 우리 정치를 망치고 있다. 정치는 타협하고 협상하는 생물이다. 이런 속성에서 벗어나면 괴물이 된다.

'세종실록'에 가장 많이 보이는 단어 중에 '함께 더불어 의논한다'는 뜻의 여의(與議)가 있다.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汝矣島: 너의 섬이라는 뜻)를 여의도(與議島)로 바꾸면 정치가 조금 나아질까. 물론 기대도 안 한다. 이름대로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 사례에서 보듯 이름값을 하기도 쉽잖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