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4월, 일본의 한 언론인이 '만인의총' 앞에 엎딘다. 쉬 믿기 어려운 특별한 자신의 내력을 알게 된, 리노이에 마사후미는 무덤 앞에서 경건한 예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 남원전투에서 전사한 만인의 혼백을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그 제단 앞에서 말이다.
그는 취재차 걸음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상을 찾아나선 뿌리 여행이었다.
1597년 정유년, 다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남서해권과 곡창지대 호남을 장악하고 우회하여 서울로 진격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8월로 접어들면서 왜군은 원균이 지키던 한산도(칠천량전투)를 무너뜨렸다. 임란 이후 줄곧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남서쪽으로 진격해 오는 왜군을 더 이상 막을 힘이 없었다.
왜군이 남쪽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남원성 안의 민심이 흉흉하였다. 명나라의 지휘관 양원은 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왔고 호남지역의 관군들도 남원으로 몰려들었다. 지난 임란 때 웅치산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낸 전라도병마절도사 이복남을 비롯하여 남원부사와 순천부사 등 1천 여명에 가까운 장병이 남원성에 도착하였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죽음이 두려운 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비장한 웅변을 남긴 이복남은 왜군의 진을 향하여 다래를 크게 치자 창칼을 높이 든 1천여 명의 군사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6만의 왜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군의 선봉대가 남원성 밖에 진을 치고 타다 남은 돌담과 흙벽을 밟고 총을 겨누었다. 명군과 조선군은 불화살(화전)과 승자소포로 맞섰으나 조총 소리가 울릴 때마다 아군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무더기로 쓰러져나갔다.
8월 15일, 급기야 왜군들이 성 밖 해자를 풀더미로 평평하게 메우고 성벽을 넘어 무자비하게 공격하자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서는 조선군과 뒤엉켜 피아간 칼날이 번쩍거렸다. 숨 가쁜 살육전은 그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새들도 숨을 죽인 밤, 휘영청 밝은 달빛은 되레 음산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였다.
양원은 교묘하게 성을 빠져 달아났고 전라병사 이복남과 남원부사 임현 등 관군과 사민들은 모조리 산화하고 말았다. 이름 없는 민초들의 시체가 무덤을 이룬 성안에는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일부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 포로 속에 이복남의 막내아들이 있었다. 일곱 살의 어린 이경보는 혼란한 틈에 가족을 잃고 홀로 된 채 왜장 모리 히데모토에게 포로로 잡힌 것이다.
"이 아이는 내가 데리고 갈 것이다."
겁에 질린 경보는 아버지의 원수에게 잡혀가는 신세였지만 어찌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이경보는 모리에게 받은 리노이에 모터히로(李家元宥)란 이름으로 살면서 점차 일본인이 되어갔다. 그리고 모리 히데모토의 영지인 죠슈번에서 '리노이에' 가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전쟁 이후 1607년부터 조선과 일본 막부 사이에 전쟁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을 되찾아오는 쇄환외교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갈수록 피로인들은 점차 일본화 되었고 특히 어린 나이에 잡혀간 이경보는 고국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해진 채 모리에게 받은 성과 이름이 원래의 자기 이름인 줄로 알고 살았다. 그후 4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니 그 후손 중의 한 사람이 곧 '리노이에 마사후미'다.
서울에 있는 이복남의 묘소를 찾은 그는 "할아버지, 400년 후대의 손자 리노이에 입니다. 저는 조선의 혼백과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왔습니다." 고 고백하였다.
전쟁의 핏자국 속에서도 한 알의 씨앗이 떨어져 무럭무럭 자랐다. 모순과 슬픈 내력을 지녔지만 생명 줄이기에 경이롭다. 뿌리는 모든 생명의 바탕 인자요 정체성을 말해주는 원초적인 내면의 세계이니까 말이다.
알렉스 헤이의
인간도 민들레 홀씨처럼 어디론가 날아가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세(世)를 이어나간다. 그런가 하면 또 어디에선가 우리 땅으로 날아온 한 톨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잎과 가지를 무성하게 뻗어내기도 한다. 살아있는 것들의 질긴 모습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함이 있다.
시공을 뛰어넘는 조손의 만남, '리노이에 마사후미'의 걸음 위에 또 다른 영원성을 만난다.
김정식 육군삼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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