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실뜨기하던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입력 2022-05-12 11:12:19 수정 2022-05-12 17:26:28

장석주 시인

장석주 시인(인문학저술가)
장석주 시인(인문학저술가)

내가 어렸을 때 시골 누이들은 실뜨기 놀이를 즐겨 했다. 실이나 노끈의 양쪽 끝을 연결한 실테를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번갈아가면서 손가락으로 걸어 떠서 여러 모양으로 변형시키는 이 놀이는 심심함을 잊기에 좋았다. 누가 실뜨기 놀이를 고안해 냈는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이들은 그 즐거움에 빠져 보냈다. 간혹 어른들의 꾸지람도 없지 않았지만 누이들은 한나절을 찐 고구마를 먹고 까르륵거리며 실뜨기 놀이에 열중했다.

실뜨기 놀이는 나바호족, 에스키모, 오스트레일리아나 뉴기니 원주민이 만든 놀이 중 하나라고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인류학 교수인 A. C. 해던(1855~1940)은 뉴기니 섬이나 보르네오 섬 등지에서 줄을 갖고 갖가지 동물 모양을 만드는 놀이를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의 딸 캐슬린 해던 리시베스(1888~1961)도 이 인류학적 놀이를 연구하면서 태평양 섬의 원주민들을 만난다. 원주민들과 말은 달라도 서로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을 때 흥분과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놀이는 동아시아 국가인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해 필리핀, 보르네오 등지에서도 성행했다. 실뜨기 놀이는 유럽에도 전해졌지만 문명국가에서는 그 맥이 이어지지 못한 채 끊겼다.

1960년대 한국 농민들은 가난으로 허덕였다. 어른들이 오늘의 버거운 삶과 암담한 내일에 진절머리를 칠 때도 누이들은 실뜨기 놀이를 즐겼다. 어느 사이에 동백이나 모란보다 더 화사한 누이들이 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의 형과 삼촌들이 '청룡부대'나 '백호부대'에 뽑혀 베트남에 파병되고, 누이들은 구로공단에서 가발이나 인형을 만들거나 '금성사 라디오'나 '대한전선 텔레비전' 부품 조립 라인에서 일했다.

구로공단과 달동네가 있던 시절, 우리는 채변 봉투를 갖고 등교하고, 교실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다.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나훈아의 '고향역', 남진의 '님과 함께' 같은 대중가요가 대유행을 했다. 공단 쪽방에 살던 누이들은 낮엔 '산업 역군'으로 일하고, 밤엔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를 다녔다. 산업화 시대와 계엄과 위수령의 시대를 지나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어느덧 구로공단이 디지털 산업단지로 바뀌고, 나라 살림 규모는 예전과 견줘 몇백 배나 더 커졌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들어서며 생산 강제와 성과 강제에 포박된 채로 각자는 고립 속에서 자기 생산에 몰두한다. 재벌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전통시장은 거대 쇼핑몰로 탈바꿈하며, 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계층 간 소득 불균형의 골은 깊어졌다. 가난은 고착되고, 현실의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공장형 양계장에서 닭들이 24시간 알을 낳는 동안 젊은이들은 계층 간 이동 사다리가 사라진 사회에 절망하며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친다.

돌이켜보면 누이들과 실뜨기를 하던 시절은 좋은 시절이었다. 그 한가롭고 즐거웠던 시절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공장에서 가발이나 만들던 누이들은 이젠 할머니가 되었다. 시골에 실뜨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없다. 그저 빈집을 지키며 허공을 향해 짖는 개와 경로당을 찾는 노인 몇몇만 남았을 뿐이다.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그치고, 마을 공동체가 소멸하는 동안 삶의 질은 얼마나 더 높아졌고,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졌을까.

누이들이 그 특유의 화사함과 명랑함을 잊은 채 노동 현장에서 '여공'으로 산 세월은 '유효한 역사'일 텐데, 우리는 그 '유효한 역사'를 기억에서 밀어내느라 분주하다. 그 망각은 더 높은 윤리 지표 위에 삶을 세우는 일의 태만에서 나타나는 삶의 실패이자 유죄의 증거일 테다. 우리가 놀이 능력을 잃고, 삶의 방향성도 잃은 채 갈팡질팡하며 나아가는 사이 실뜨기하던 소녀들은 다 사라졌다. 그 소녀들 중 하나라도 어렵게 생계를 잇다가 고독사를 맞는다면, 이 불행의 책임은 마땅히 우리의 몫이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