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향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
눈부시게 새하얗던 꽃잎이 다 떨어지고 불그레한 꽃자루만 남더니 이제는 초록 이파리만 무성하다. 이렇게 올해 벚꽃도 다 졌다. 해마다 벚꽃을 보는데 볼 때마다 이쁘고 설레는 것은 벚꽃의 매력 때문일까, 벚꽃을 보는 내 마음 때문일까, 아님 혹시 기억을 못 하는 걸까.
벚꽃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요즘 벚꽃 구경하기 가장 좋은 곳은 바로 '우리' 동네(그냥 자신이 사는 곳)이다. 꼭 벚꽃의 바다나 구름, 터널을 경험하고 싶다면야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을 들여야 하겠지만. 도시 근교에서는 벚꽃과는 엄연히 다른 복사꽃, 살구꽃, 자두꽃, 배꽃, 사과꽃 등도 살짝 볼 수 있지만 도시인에게 흐드러지게 피고 흩날리는 하얗거나 분홍빛을 띠는 꽃 모두는 그냥 마음속에서 벚꽃으로 기억된다. 그렇다. 이렇게 벚꽃은 기억된다.
어느 따스한 봄날 엄마 손을 잡고 거닐었던 벚꽃길의 포근한 추억이 어렴풋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그 기억이 두 살 반 전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은 두 살 반 이전은 기억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영아기 기억상실증'(Infantile Amnesia)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해 기억장애는 아니고 인간이 자연스럽게 발달(development)해 가면서 어느 순간 기억의 저장과 인출 방식이 바뀌어서 머릿속에 저장은 되어 있지만 인지 체계의 버전(version)이 달라져 그 기억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몸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낯설어진 단어 '소풍'과 벚꽃이 짝지어져 머릿속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소풍 가서 마셨던 탄산음료의 짜릿한 맛이 함께 떠오를지도 모른다. 근데 그때가 언제였더라. 가물가물하다. 그때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할부금 납입을 완료하고 약정이 끝나 최신의 스마트폰으로 갈아타면서 그동안 찍어두기만 하고 자세히 보지 않았던 무수한 사진들, 이걸 모두 옮기나 마나 하면서 들여다본 휴대전화기 속 갤러리(사진첩)에는 유난히도 벚꽃 사진이 많다. 그러고 보니 해마다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어느 해는 일이 바빠 햇살 속에서 벚꽃을 보지 못하고 퇴근길 가로등 불빛 아래 환하게 빛나던 벚꽃을 단독 샷으로 담아 두기도 했을 것이다. 밤 벚꽃 그 얼마나 기막히게 아름다운가.
대학생들은 벚꽃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그들에게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란다. 중간고사를 치르는 것도 아닌 어떤 누군가에게도 때로 벚꽃은 슬프거나 밉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벚꽃은 죄가 없다. 벚꽃 피는 4월이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노래가 몇 곡 있다. 벚꽃의 엔딩이 올 때까지 한동안 우리는 그 노래를 들으며 귀로도 벚꽃을 기억한다. 흩날리다 쌓인 벚꽃잎 한 무더기를 남이 볼세라 재빨리 머리 위로 뿌려 보기도 한다. 꽃잎의 감촉이 보드랍다. 벚꽃이 만개하여 눈처럼 내리던 4월 어느 날, 나는 약간 이르게 수업을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2022년 벚꽃과 자신의 모습을 함께 찍어 수업 게시판에 업로드하는 것으로 출석을 체크했다.
사진 속 청춘들의 환한 미소도 벚꽃도 나에게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기억될 것이다. 이렇게 해마다 벚꽃에 관한 일화기억(Episodic Memory)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디테일 대부분은 잊히고 수많았던 벚꽃의 추억은 하나의 의미기억(Semantic Memory)으로 남아서 기억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결국 단 하나의 '벚꽃'이 남으리라.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벚꽃을 보았는지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올지라도 눈으로, 귀로, 촉감으로 경험했던 그 벚꽃들을 몸으로 기억하며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겠지. '벚꽃 참 이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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