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자 소설가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에서 마지막 인류로 남게 된 이유 중에 '할머니 가설'이라는 게 있다. 신체적으로 쇠약한 노년층이 무슨 수로 그랬을까, 의문이 들었다. 학자들에 의하면 호모사피엔스는 몸집이나 뇌 용량이 네안데르탈인보다 작아서 수렵생활에 더 불리한 조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눈에 띄는 점은 할머니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고, 타 가족집단과의 교류가 활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호모사피엔스 할머니는 생식기능을 잃은 후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아 후손들의 양육에 몰두했다. 생물학적인 변이로 인한 일종의 분업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할머니라는 세대의 존재 이유를 진화학적으로 살펴보니 아래로만 흐르는 사랑의 섭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할머니는 자신의 후손을 말 그대로 살아남게 하는 일, 바로 그것이 본분이었다. 사자나 여타 동물은 약한 새끼를 버리지만 사람은 다르다. 잘 나거나 약한 아이를 가려낼 이유가 없었다. 신체의 힘으로만 존재의 생존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던 호모사피엔스의 세계였다.
손자와 할머니 사이에는, 그들을 이어준 세대 하나가, 시간의 간극으로 혹은 빠진 이처럼 빈 공간을 가졌다. 그리하여 직접 맞닿은 세대 간에 필연적인 애증의 밀착도가 느슨해졌고, 어떤 틈이 생긴다. 할머니는 그 틈의 건너에 있는 손자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서 하늘색 허공과 같은 크고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예술과 철학이 싹틀 수 있는 초월적인 시공간의 틈새 같은 것 말이다.
그들이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사냥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고, 또다른 아이는 흙을 주물러 그릇을 만들고는 그 겉에 무늬를 새기고 있다. 할머니는 그것을 쓸데없다고 나무라지 않는다. 할머니부터 사냥에서 제외된 잉여계층이라 할 수 있었으니. 그런 할머니의 무릎 주변에서 다양하고 분화된 구성원이 길러져 사회구조와 문명의 길라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다른 면을 보면 현대의 정의라는 개념에서 타인을 대할 때의 정답이 바로 할머니의 태도이지 않은가.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존중 하여라'같은. 아프리카 격언에 노인 한 사람은 도서관 하나와 같다고 했다.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필요치 않다는 사람이 있다. 그건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원형의 할머니와 같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잔혹한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세상의 따스하고 너그러운 할머니들. 내게도 그런 사람이 몇 있다. 가을이 되면 내가 좋아하는 홍시를 건네는 그녀, 거센 파도 앞에 같이 서 있어주던 그녀, 아랫목을 내주던 우문에 현답으로 응수하는 비판을 아끼지 않는 그녀, 나쁜 것에서 내 눈을 가려주는 그녀, 그녀들.
주변에 할머니 몇은 손주가 생기기 전에는 아이를 봐주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작고 보드라운 생명이 태어나기만 하면 달라진다. 그러고 보니 손주에게 달려가는 마음길은, 우리 의식의 선택이 아니라 바로 유전자 자체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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