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에게 줄서기는 천성과도 같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줄을 서고, 혼자서도 줄을 설 정도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냥 알아서들 잘한다. 그걸 아는데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에릭 와이어가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읽었는데, 영국인은 일생동안 줄서는데 6개월을 쓴다."고 할 때, 나는 "그렇게나?"하면서 몹시 놀랐더랬다.
다른 유럽인은 그렇지 않다. 이탈리아의 시외버스 정류장에서다. 버스가 도착하니, 제각각 흩어져 기다렸던 승객들이 한꺼번에 마구 몰려들었다. 나는 예매한 티켓을 들고서도 버스를 못 탈까봐 전전긍긍 했었다. 영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영국인을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더 공평한 줄서기'가 영국에는 1973년에도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은행이나 우체국에서 모두 한 줄로 기다렸다가 순서에 따라 창구로 나가는 줄서기 말이다. 이제 우리는 '번호표가 나오는 기계' 덕분에 줄 설 필요조차 없어졌고, 줄서기 의식이 높아져 공중화장실에서도 '더 공평한 줄서기'가 지켜진다. 그런데 나는 영국에서 이런 기계를 본 적이 없다. 굳이 변화할 필요를 못 느끼는 영국인은 아직도 은행과 우체국에서 줄을 선다.
영국에서 유일하게 '줄을 서지 않는 곳'은 펍(pub)이다. 웨이터가 없어 주문은 직접 가서 하는데, 줄서지 않더라도 직원과 손님 모두가 각자의 순서를 잘 알고 있다. 또 간혹 '보이지 않는 줄'도 있는데, 버스정류장 가까이에서 차례를 기억하며 기다렸다가 버스가 오면 조용히 순서대로 버스에 타는 거다.
장날, 제일 복잡한 채소가게에서도 줄서기는 어김없다. 사람들은 비치되어 있는 종이봉투에 채소를 '담은 후'에 줄을 선다. 한명이 아니라 '두세 명'의 채소장수가 각각 순서대로 채소의 무게를 재고, 추가로 원하는 채소를 담아주고, 계산해준다. 참 공평하고 합리적이고 차분한 방식이다.

새치기는 보기 힘들다. 보더라도 대부분 외면하거나 못 본 척한다. 속으로는 상당히 기분이 나빠도 대놓고 뭐라고는 안 한다. 〈영국인 발견〉에서 영국문화인류학자 케이트 폭스는 "우리가 의분으로 안절부절못해하고, 찌푸리고, 투덜거리고, 화를 못 삭여도, 실제로 항의하고 새치기 꾼에게 뒤로 돌아가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 거의 없는 모습'을 보고 경험한 적 있다. 처음으로 소포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는데, 새치기하는 영국여인을 보았다. 옆에서 줄서있던 나는 물어볼 게 있어서 창구 앞으로 나갔다. 그 순간, 뒤에 서있던 할머니가 큰소리로 외쳤다. "Excuse me! Queue up!(여보세요! 줄서세요!)"라고. 내가 "물어볼 게 있어서요."라고 했지만, 그는 영국여인은 못 보고 내가 새치기를 했다고 나에게 야단을 친 거다.
제자리로 갔다가 내 차례가 되어 직원에게 물었다. "이렇게 매번 줄을 서야 하느냐?" "옆에 서서 주소를 써오면 처리해줄 수는 없느냐?"고. 내가 몇 번이나 줄섰던 것을 아는데도, 그는 "여기서 처음 일하므로, 난 잘 모른다."고 했다. 어물쩍 넘기는 그의 대답에서 나는 자신의 일이 아닌 양 외면하려는 영국인 특유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케이트 폭스는 또 말했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저지른 온갖 규칙 깨기 실험 중에서도 새치기가 가장 힘들고, 불쾌하고, 기분 상하는 일이었다. 일부러 부딪치기, 집값 물어보기, 직업 물어보기보다 더 힘들었다. 실험할 때마다 새치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두려울 정도로 부끄러웠다."고. 나도 그랬다.
그가 지금 실험중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나도 말할 수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우체국에 왔었고, 소포의 규격박스를 사느라 줄섰고, 테이프와 가위를 빌리느라 줄섰고, 주소는 어디에 적는지 묻느라 줄섰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줄선 게 네 번째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몹시 당황스러웠다. 한참 후, 영국에는 여전히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 치는 어른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서야 얼추 마음이 가라앉았다.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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