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영면] ‘보통사람의 시대’ 열고 민주화에도 일정 역할…5·18 등 진실 끝내 침묵
북방 외교·주택 200만호 공급 功…신군부 쿠데타·비자금 過
한국 정치사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만큼 공과(功過)가 뚜렷한 인물을 찾기 어렵다. 고인은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대통령으로 영욕과 부침의 삶을 걸었다.
◆'바늘과 실' 육사동기 전두환 전 대통령
노 전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로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해 12월 12일 신군부의 권력 찬탈을 주도하며 정치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같은 대구경북(TK) 출신으로 운명적인 애증관계를 이어온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였다.
고인은 전 전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로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두 사람은 이후 '바늘과 실'의 관계를 유지했다. 보병 소대장을 지낸 후 미국을 떠나 특수전학교 대인 심리전 과정을 마쳤다. 이후 육사 11기를 주축으로 하는 사조직 '하나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공수특전여단장 등 육군 내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12·12 쿠데타의 핵심 역할을 하며 혜성처럼 떠올랐고, '포스트 전두환' 준비에 들어간다.
5공 정권 출범 뒤 정무2장관을 시작으로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85년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돼 권력의 2인자 자리에 올랐다.
◆'6·29 선언'으로 청와대 입성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된 결정적 계기는 '6·29 민주화 선언'이었다. 그 직전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한 전 전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에 대해 "고뇌에 찬 역사적 결단"이라고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체육관 선거'로 대권을 잡으려던 그였지만, 6·10 민정당 대선후보 선출 전당대회를 계기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자 당시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 항이 담긴 선언문을 전격 발표했다.
김영삼 민주당·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 이른바 양김(兩金)의 분열까지 간파한 정치적 승부수였고, '보통사람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청와대에 입성하기에 이른다.
노 전 대통령이 문을 연 6공화국 5년은 권위주의 시대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민주화의 욕구가 분출한 시기였다. 노동조합 설립에 유연성을 보이고, 5공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민주화 실현에 큰 역할을 했다.
또 표현의 자유를 옥죄던 '언론기본법'을 폐지했고, 정기간행물 등록을 개방했으며 신문 증면과 구독료 자율화를 보장했다. 자율의 리더십을 표방하며, 점진적인 개혁 조치로 민주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게 고인의 정치 철학이었다.
취임 두 달 만에 초유의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정상적 국정 운영에 제동이 걸렸지만, 북방 외교 등에서 혁혁한 성과를 냈다. 옛 소련이 해체되고, 미·소 냉전체제가 붕괴된 뒤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북방 외교로 공산권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이즈음 러시아·중국과 수교가 이뤄졌다.
또 유엔에 북한과 동시 가입했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을 열어 문화·체육 교류 활발하게 전개하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에 나섰다. 1991년 11월에는 원자폭탄 개발 및 핵개발의 최종 포기를 선언하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하는 결실을 거뒀다.
단기간에 아파트를 대량 공급한 탓에 건설경기 과열 등의 부작용을 낳았음에도 1기 5대 신도시에 200만호 주택 건설 프로젝트를 시행한 것은 주요 업적 중 하나로 손꼽힌다. 88올림픽 성공 개최, 전 국민 의료보험제 도입, 범죄와의 전쟁, KTX(고속철도) 및 인천국제공항 건설 청사진도 고인의 작품이다.

◆'물태우' '비자금' '구속'
빛이 찬란한 만큼 그림자가 짙었다. 결국 임기 중반부터 레임덕에 빠졌고,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판 속에 '물태우'라는 달갑잖은 별명을 얻었다. 정작 그는 "사람들이 나를 '물태우'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은 매우 좋은 별명이며, 나는 물 같은 지도자로 보이는 게 좋다"고 넉넉하게 받아 들였다.
민주당·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띄우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임기 내내 정권 내부 갈등에 시달려야 했다. 호남 기반의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을 에워싸는 지역연대라는 비판에도 시달렸다.
야권의 요구에 5공 청문회를 받으면서 전 전 대통령 부부를 백담사로 유폐시켜 보수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김기훈 씨 유서대필 논란 같은 시국 사건은 정권의 정통성 문제로까지 비화됐다.
퇴임 후 터진 '노태우 비자금'은 일생일대의 오욕이었다. 1995년 노 전 대통령이 4천억원대 비자금을 축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비자금 수수와 뇌물조성 혐의 등으로 구속돼 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됐다.
이 사건은 또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등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애초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소유예 처분했지만, 여론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자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12·12 등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1종의 훈·포장을 박탈당하면서 '쿠데타의 주범'이라는 오명으로부터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1997년 김영삼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석방됐지만, 2002년부터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사실상 칩거 생활을 해왔다.
이후에도 12·12와 5·18의 진실, 3당 합당 과정, 비자금의 용처 등을 놓고 진상 규명 요구가 이어졌지만, 노 전 대통령은 입을 닫은 채 '재평가'라는 과제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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