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된 암호 소통
『삼국유사』에는 거리에서 백성끼리 나눈 은어(隱語)가 등장한다. 정치를 잘못한 진성여왕을 비난한 다라니(陀羅尼) 은어다. 여왕의 유모, 위홍(魏弘) 등 서너 신하의 난정(亂政)으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남무망국(南無亡國) 찰니나제(刹尼那帝) 판니판니소판니(判尼判尼蘇判尼) 우우삼아간(于于三阿干) 부이사바하(鳧伊娑婆訶)'라는 은어가 퍼졌다. 대략 '여왕이 서너 간신과 유모로 망하리'란 뜻이다.
이런 끼리끼리 통하는 오랜 역사 속 은어처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도 은어 암호(暗號)가 일상처럼 쓰였다. 은어 암호는 비밀 유지를 위해 당연했다. 이런 은어 암호 말고도 새소리, 봉화(烽火), 수기(手旗), 헝겊 등을 활용한 다양한 암호 소통이 등장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인의 눈물겨운 희생의 사연도 얽혀 있다.

◆'콩은 1월 8일 팔겠다' 전보
"곡물시세 맞아서 콩은 1월 8일에 팔겠다." 1931년 12월 일본에 잠입한 이봉창의 전보는 한도원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됐다. 1932년 1월 8일은 일본 도쿄에서 만주국 부의 황제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에게 이봉창이 수류탄을 던진 '왜왕 폭살 미수사건'이 터진 날이다. 이봉창이 적국 심장부 일본 도쿄에서 벌일 의거일을 알린 전보문은 아무도 모르게 이렇게 은어로 꾸며졌다.
일본 언론은 '저격일황부중(狙擊日皇不中)', 국내 『동아일보』는 '대불경사(大不敬事)'로 보도했지만 중국 국민당 기관지 『청도국민일보』는 '한인 이봉창, 저격일황불행부중(狙擊日皇不幸不中)'이라 썼다. 다른 중국 언론도 '불행부중'으로 표현했다. 이에 일제는 『청도국민일보』에 난입, 파괴행동을 저질렀고 김구는 이를 『백범일지』에 기록으로 남겼다.

박재혁도 일본발(發) 부산행(行) 배에서 1920년 9월 4일 편지로, 9월 14일의 거사 즉 하시모토 부산경찰서장 폭사사건(박재혁사건) 결행 계획을 전했다. 그는 "장사 상황이 매우 좋다(商況甚如意).…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을 것 같다(可期許多收益).…다른 장삿길이 있어(有路商路) 전에 비해 수익이 좋다(比前益好).…열락선타지말고(熱落仙他地末古) 대마도로서간다(大馬島路徐看多)"고 썼다. 장사꾼으로 꾸며 연락선 대신 대마도 노선으로 바꿔 가고 있음을 장사 은어로 전했다. 고서(古書) 장사꾼처럼 위장, 부산경찰서장을 찾아가 폭사시키고 잡힌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1921년 5월 11일 단식 순국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은어 자료에 대한 연구(이은영, 『한국독립운동과 암호』)에는 1915년 비밀결사 조선국민회에서 조선국민회를 '상업(商業)·실업(實業)·농업(農業)', 권총을 '돼지다리'(豚脚), 미국 하와이를 '단산'(檀山)이란 은어로 쓴 사례가 나온다. 중국 북간도의 1910년대 사용 전보 은어에 '포목(布木) 시세 한 필 삼십 일원', '청어 한 짝 삼십 일원'의 사례가 있는데, 이는 한국의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뜻했다.
1932년 5월 30일 김구도 일본 총독 등 처단에 나선 22세 최흥식에게 은어로 쓴 편지를 보냈다. 김구는 "상해는…상업은 부진이나 그곳에서라면 영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일화 200원을 보내 두어 소상업(小商業)이라도 경영하게 했으나…상품은 군(최흥식)이…형편이 좋을 대로 해라. 졸자(김구)는…투기영업을 하여 대성공이었다.…"며 일제 처단에 쓸 군자금 송금 사실 등을 은어로 알렸다.

다른 사례로 1919년 중국 상해에서 결성된 독립단의 28가지 은어도 전한다. 『동아일보』는 1921년 3월 13일 독립단 중앙총무총장 차석제가 부하에게 지시할 때 쓴 은어를 소개했다. 총독은 천관(天官), 헌병사령관 지관(地官), 도지사 사관(師官), 군수 학(鶴), 군서기 비둘기(鳩), 경찰서장 토끼(兎), 일본인 순사 큰 돼지(大豚), 한국인 순사 새끼 돼지(小豚), 친일파 꿩(雉), 밀정 여우(狐), 권총은 닭다리(鷄脚)라는 은어로 표시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흠치교에서는 군자금을 고폐(古幣)로, (대한)광복회는 회원을 '갱부', 군자금 납부 회원 1명 입회를 '금광 1개소 발견'이란 은어로 표현했다. 박상진이 만든 경천어동지회(敬天語同志會)는 회원끼리 통하는 말투, 즉 '비가 오신다, 바람이 부신다, 구름이 흐리신다'는 등의 은어로 일제 감시의 눈길을 피하며 회원 확보와 만주에서의 독립투쟁 이주민 모집 등 활동을 벌였으니 일제도 속을 수밖에 없었다.

◆ 봉화에 나선 어린이 체포돼
또다른 소통 방법으로 헝겊 암호, 새소리, 봉화(烽火), 수기(手旗) 등도 사용됐다. 특히 만주 일대의 한국인 독립운동 현장 발굴 역사연구 작가(강용권,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상·하권)의 기록에 나오는 어린이 봉화대 희생 이야기는 가슴이 저민다.
먼저 마을주민의 집단 지혜가 빛난 헝겊 암호 사례는 충북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 마을의 '독립군 느티나무'에 얽힌 사연이다. 서울과 지방을 잇는 요지의 마을인 탓에 일제 감시와 수색이 촘촘한 만큼 일제의 낌새가 있을 경우 마을에서 하얀 헝겊을 나무에 묶었고 독립 투사는 이를 보고 피신 또는 동료에 전파,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영동군이 수령 350년의 이 나무를 1982년 보호수로 지정, 관리하는 까닭이다.
중국 경우 항일 유적지 답사로 독립투사의 행적을 추적한 강용권 연변 작가에 따르면 일제 토벌에 맞서고 한국인 마을 주민 안전을 위해 항일 유격대가 쓴 통신연락 방법에는 ①새소리 ②포탄 터뜨리기 ③나무통 두드리기 ④봉화 ⑤수기신호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주 연길에서는 1931년 일본군 토벌 피해를 막으려 깃발로 한글 자모를 활용한 신호를 주고 받는 방법이 고안되고 이듬해 학교 아동들 대상으로 가르쳤다고 그는 전했다. 그는 또 실제 총탄이 오가는 전투장에서 수기 신호에 나선 김순옥 여성의 증언을 실었다. 조를 짠 학생이 학교 수업 뒤 순번을 정해 이뤄졌던 수기 신호는 일제 토벌과 항일 유격대 철수로 1년 여만에 사용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기 신호보다 앞서 쓰인 새소리, 포탄 터뜨리기, 나무통 두드리기, 봉화 암호는 위치가 추적되기 쉬웠고, 특히 일제 토벌대와 밀정의 수색으로 봉화에 나선 어린이들이 체포되거나 피해를 입은 것으로 강 작가는 기록하고 있다. 독립투쟁사에 중국 땅 만주에서 일어난 어린이 봉화대의 희생은 기려야 할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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