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시대의 파멸을 경고하는 어떤 목소리

입력 2026-04-16 16:54:22 수정 2026-04-16 16: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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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49호 품목의 경매
토머스 핀천 지음/ 민음사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번역자가 영문학자 김성곤 교수였다. 내겐 영화에 해박한, 특히 할리우드 영화 속 상징과 은유를 탁월하게 그려낸 것으로 더 기억되는 이름이었다. 의도한 듯 복잡하면서 정교하고, 난해하면서도 선명한 상징체계가 애리조나 사막 도마뱀 껍질처럼 불친절하게 뒤엉켜 달라붙은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 김성곤 교수가 쏘아 올린 영화 해석의 바탕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토머스 핀천이었다.

1960년대 미국을 엔트로피의 세계관으로 묘사한 토머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느닷없이 서부 재벌의 유산 공동관리인이 된 한 여인의 행적을 통해 일그러진 미국의 꿈을 애통해하는 소설이다. 책을 읽으며 떠올린 것은 코엔 형제였다. 기상천외한 세계를 묘사해야 하는 창작자의 고통을 표현했고, 무수한 상징과 난해한 미장센이 뒤섞여 혼란을 야기했을지언정 코엔 형제의 가장 빛나는 한 때를 상징하는 <바톤 핑크> 말이다.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소란스럽고 선정적이면서 비릿한 점액질로 가득하다. 토머스 핀천은 모종의 계략에(빠졌다고 확신하는) 공동관리인 에디파 앞에 온갖 형상을 도열하는데, 아름답고 찬란한 것은 신기루일 뿐 하나같이 추하고 악취 풍기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킬 따름이다. 친절과 무례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걸핏하면 에디파를 욕망의 신전으로 밀어 넣는다. 시종일관 그녀가 만나는 남성들에게서 신사다운 품위나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까 한 줌 단서를 쥐고 육체와 거래하려는 저열한 자들의 세계를 환상방황(環狀彷徨)할 뿐인 여인. 예컨대 에디파의 고문변호사 로즈만은 식탁에서 다리를 건드리고, 또 다른 공공관리인 메츠거는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주주총회장에서 만난 쌍둥이 노인은 거침없이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는다. 대체 이 과도한 소란은 다 뭐란 말인가?

온갖 진통을 겪고서야 에디파는 약음기 달린 나팔이 상징인 트리스테로(Tristero)의 실체에 다가선다. 트리스테로는 소외와 상속권을 박탈당한 계층을 지칭하는데, "1853년 이전 특정한 시기에 미국에 등장했고, 검은 옷을 입은 무법자나 인디언으로 가장해서 포니 익스프레스, 웰스 앤드 파고 컴퍼니 등의 공식 우편제도와 맞섰다." 즉 에디파가 만난 다양한 은유와 상징을 묶을 수 있는 건 트리스테로 밖에 없었다는 것.

책의 마지막, 에디파는 미국 사회가 닫힌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환락과 폭력과 과도한 자부심 아래 숨죽인 소외계층들, 이를테면 에다파가 만나는 빈민, 병든 선원, 용접공, 야경꾼, 동성애자, 창녀는 아메리칸 드림이 배태한 짙은 그림자에 다름 아니다.

토머스 핀천은 공업물리학 장학생으로 코넬 대학에 입학한 공학도였고, 보잉사에서도 근무한 전력답게 과학 이론을 소설에 대입해 은유로 사용했다. 1966년 쓰인 이 소설에서 핀천은 우리의 세상이 거대한 매트릭스와 다름없다는 통찰을 보여준다. 자신이 알고 믿어온 세계는 허구이며 진실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에디파를 통해서.

영화평론가 백정우

『제49호 품목의 경매』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매튜 펄의 『단테클럽』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의 시작과 끝이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부른 '제49호 품목'은 끝내 허구를 쫓는 사람들을 희롱하는 일종의 맥거핀(MacGuffin: 핵심으로 위장하여 관심을 끄는 트릭)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