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활인대 축조 당시 공덕을 베푼 사람의
공덕을 기리는 은각비(恩刻碑)만 달랑 이곳 당
산나무(300여년 수령의 회나무) 아래 잡다한
공덕비들과 함께 초라하게 세워져 있을 뿐이
다. 서낭대 놀이 또한 해방 이후 맥이 끊겼다
가 3년 전 인근 농가에서 뜻밖의 서낭기가 발
견됨으로써 합천오광대보존회(회장 오세창)에
서 원형찾기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활인대는 1757년(영조 33년) 변광주(卞珖
株) 선생이 감영(監營)에 청원, 마을 뒤 석섬지
기 밭을 사서 최초로 축조한 것으로 비문에 적
고 있다. 당시 덕곡면 일대가 낙동강 한가운데
에 위치했으므로 해마다 홍수가 나면 온 마을
이 수몰되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등
큰 피해를 입자 이같은 인공섬(대피 장소)을
만들어 수천명의 생명을 구했다.
홍수가 나면 마을 사람들은 가재도구와 먹
을 양식, 가축들을 모아 이곳에서 생활하고 강
물이 빠지면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했다.
특히 1796년(정조 29년) 대홍수 때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난 병진(丙辰)년 6월에 강의 물이 크게
연결되어 강촌 백성들이 모두 수중혼이 되었
으나 율지촌의 백성들은 이 활인대에 올라가
서 천여명이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서 돌아
갔으니, 이와 같은 큰 은혜는 죽더라도 또한
보답하기 어려우리라…."는 기록으로 보아
'생명의 축대'였음을 짐작게 한다.
이후 120여년이 지나 축대가 퇴락하고 그
기능이 떨어지자 1877년(고종 14년) 송학봉 (宋鶴鳳)·하진오(河進五)씨가 초계군수에 청
원하여 관용전(官用錢)과 성금
으로 수축했다.
이 은각비는 1919년(철종
19년) 류광원(柳光元)씨 등이
"활인대로 인해 누대에 걸쳐
여러 차례 목숨을 구하게 된
주민들이 은혜를 잊지않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고 적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지금까
지 관심조차 갖지 못한 채 묻
혀오다 최초 축조한 변광주
선생의 후손인 대구 기풍수지
리연구가(氣風水地理硏究家)
변종수(卞鍾秀)씨에 의해 재조명 되고 있다.
비문을 번역한 백두현(경북대학교 국어국문
학과) 교수는"오랜 풍파에 비문이 낡고, 특히
이두음 문자가 많아 일반 사람이 알지 못함이
안타깝다"며"선조의 지혜로 수많은 인명을
구한 곳인 만큼 교과서 수록 등 문화유산으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활인대는 오광대의 유래와 관련된 민
담도 간직하고 있다. 민간설화에는"옛적 큰
홍수 때, 나무 궤짝 하나가 밤마을에 떠내려와
건져보니, 그 속에 가면들이 가득 들어있고,
'영노전 초권(初券)'이라는 책이 들어있어 따
라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오광대 탈놀음의
시작이었다. 대홍수 때 사람이 대피한 곳이 활
인대인 만큼 궤짝을 건진 곳도 활인대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서낭대 놀이 또한 이 곳과 중요한 연관관계
를 맺고 있다. 이곳 촌로들에 따르면 이곳 활
인대 당산나무 아래에서 해마다 서낭제를 올
렸는데, 기타 지역의 태평과 오곡풍요, 무병장
수를 바라는 제와는 달리 홍수와 관련된 독특
함을 보여왔다고 전한다. 해마다 물난리를 겪
는 지역인 만큼 활인대 위에 당산나무를 심고
서낭신에게 제주 음향해 한해의 홍수 정도를
알아보는 것이 목적이다.
서낭대 잡이는"서낭님 올해는 어데까지 물이 올라오겠십니꺼?"라고 서낭신에게 물어
본다. 20여m가 넘는 서낭대(뿌리까지 캔 대
나무에 3색 비단을 감고, 꼭지에는 주작현무
깃발과 그 밑에 황청백적흑의 오방색 비단 깃)
를 높이 들고 나루터로 나간다. 부들부들 떨던
서낭대가 멈춰진 곳이 그해의 최고 강수위로
여겨 농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놀이는
정월 초하루에서 대보름까지 신성한 날을 택
일해 벌인 민간신앙 놀이다. 식민지시대 일본
이 마을 단합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없애 해방
이후 자취를 감췄다.
다행히 몇년 전 이 마을에 사는 김점수 할
머니 집 처마 밑에서'甲子年(1924)二月初
日'이라 제작연도가 적힌 서낭기가 원형 그대
로 발견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합천오광대보존회에서는 지난해부터 탈·
장승축제에 앞서 이 놀이를 활인대 당산나무
아래에서 재현한다.
합천군청 문화공보과 문화재담당 이기상
(53) 전문위원은"오광대와 활인대, 서낭대 놀
이는 중요한 관계를 맺고있는 만큼, 충분한 고
증과 검증을 거친다면 역사·문화마을로서의
자리매김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마을 주민 임덕천(67)씨는"옛날 마을 어른
들에 따르면'활인대의 규모가 높이 5m가 넘
었고, 길이 200여m가 넘었다고 들었다"고 말
해 현재의 초라한 규모보다 수백배가 컸을 것
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오광대 발상지며 역
사·문화마을의 정립을 위해서는 하루 빨리
활인대의 복원을 서둘러야 함은 물론 선조들
의 슬기로운 지혜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문화
재 등록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주민들
은 서낭대 놀이 또한 철저한 검정을 거쳐 이
지역의 독특한 민속문화로 자리매김될 수 있
도록 원형복원 작업을 서둘 것을 기대했다.
합천.정광효기자 khje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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