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말의 품격

입력 2021-10-14 11:14:31

박채현 동화작가

박채현 동화작가
박채현 동화작가

L선생은 키가 작고 몸도 왜소하다. 동글납작한 얼굴에 눈, 코, 입, 어느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차림새도 수수하다. 곱슬머리에 짧게 기른 턱수염을 특색으로 보더라도, 길에서 마주친다면 그저 스칠 듯 평범하다.

하루는 일 때문에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선생이 앞자리에, 내가 뒷자리에 앉았다. 초면이라서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는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차 안에는 주행 소음만 감도는데, 선생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가족이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 같았다."다행입니다. 혹시 불편하면 또 이야기 해주세요."

선생은 안도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에 또 전화가 울렸다. 제자의 안부 전화였다. 선생은 "아이쿠, 저런, 그랬구나, 그렇지, 역시"같은 말로 맞장구쳤다. 호응하듯 저쪽의 목소리가 신나게 오르내렸다. 선생은 전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 "전화해 줘서 고맙다."

이번에는 선생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에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던 모양이었다. "전화를 못 받아서 미안합니다."

조금 민망했던지, 통화를 마친 선생이 설핏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이쿠, 오늘따라 전화가 많이 오네요. 미안합니다."

순간, 급히 표정을 바꾸느라 당황했다. 선생의 통화를 엿듣다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타지에 오래 살았다는데 선생의 말에는 경상남도 억양이 여전했다. 경남 말은 투박하고 억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의 말은 어떤 말보다 부드럽고, 친근하며, 교양있게 들렸다. 선생의 말투에 내심 놀라고 감탄하던 중이었다.

"또 이야기 해주세요"는 상대의 말에 가치를 더했다. 이후에 전할 말도 아주 중요하다는 뜻이다. "전화해 줘서 고맙다"는 나도 당신의 안부가 궁금했으며, 대화가 즐거웠다는 말로 들렸다. 엿들었을 뿐인데, 내가 그 말을 듣기라도 한 양 마음이 뿌듯해졌다.

차에서 내려 선생을 다시 보았다. 왜소한 몸은 변함이 없는데, 선생이 태산에 거목같이 커 보였다. 선생의 말을 들으면 아름드리나무가 드리운 그늘 밑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너그러운 말투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선생이 쓰는 말은 흔한 말이다. 전문 용어가 아닐 뿐더러 세련된 은유나 기막힌 비유도 없었다. 다만 선생은 귀담아듣고 걸맞게 맞장구쳤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투에서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외모나 사회적 지위로 인품을 모두 알아차리기 어렵다. 말 속에 숨겨진 마음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들어 있다. 그러하기에 대화 중에 진실한 인품이 드러난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말은 모두가 안다. 같은 말도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어투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차이로 말은 상대의 마음을 열거나, 귓전에서 튕긴다.

내 말에는 진심과 정성이 들어 있는가. 타인의 마음을 열 것인가. 말의 힘을 오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