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구 경북대 한문학과 교수
당나라의 문학가 이상은(李商隱)은 세태를 풍자한 저서 『잡찬(雜纂)』에서 '절대 오지 않는 것' 몇 가지를 꼽았으니, '몽둥이를 손에 쥐고 부르는 개' '가난뱅이 선비가 부르는 기생' 등이다. 이후 그것을 계승한 청나라의 위광불(韋光黻)은 『잡찬신속(雜纂新續)』에서, '새장 밖으로 날아간 새' '집 나간 영특한 고양이' 등을 더하였다.
시간의 거리를 둔 중국 문인들의 통찰은 우스갯소리 같지만, 그 밑바닥에는 명철한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부르는 쪽의 처지와 태도, 그리고 응해야 할 쪽의 이해관계가 어긋날 때 '부름'은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위협을 품은 손짓에 응해 다가오는 생명은 없고, 소득 없는 허세의 초대에는 누구도 응하지 않으며, 억압을 뚫고 자유를 맛본 존재는 결코 과거의 질곡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신뢰와 실질이 없는 자리에 명분만 앞세워 불러들인다면, 세상 그 누구도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 정치인들은 선거철이나 그들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운 고비마다 입 모아 "민심을 받들겠다"라고 외치고, 민심이 돌아앉아 지지율이 떨어지면 온갖 대책을 쏟아낸다. 그러나 옛 문인의 혜안으로 본다면, 한 시절 정치권력의 '부름'이란 허망하기 짝이 없다.
혹여 손에 서슬 퍼런 사법의 몽둥이를 쥔 채 국민을 향해 "이리 오라"며 손짓으로 부르고 있지는 않나? 제 편의 비리와 과오는 온갖 궤변으로 덮어주면서 반대파나 힘없는 서민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권력 아래로 돌아올 국민은 없다. 손에 몽둥이를 숨기지도 않고 흔들어대며 오라고 윽박지르는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갈 개는 없다. 개조차 몽둥이의 살기를 알아차리는데, 눈 밝은 주권자가 그 위협을 모를 리 만무하다.
또한 나라의 곳간은 비어가고 민생 경제는 벼랑 끝에 몰렸는데, 실효성 없는 장밋빛 구호만 외치며 국민의 호응을 바라고 있지는 않나 돌아볼 일이다. 국민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덜어줄 실질적 대책이 없는데, 공허한 명분에 응답할 민심은 없다.
위광불이 말한 '새장 밖으로 날아간 새'와 '집을 나간 영특한 고양이'는 바로 이반된 민심의 은유로 쓸 수도 있다. 한번 자유의 하늘로 날아오른 새는 결코 비좁고 탁한 새장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영특한 고양이는 집주인의 옹졸함과 박대를 견디다 못해 담장을 넘으면 다시는 그 집의 밥그릇을 쳐다보지 않는다. 국민의 인내심이 임계점을 넘어 체념과 무관심, 혹은 분노로 돌아설 때, 민심은 새장의 새처럼 미련 없이 날아가 버린다.
권력자들은 민심이 떠나갈 때마다 "국민과의 소통과 홍보가 부족했다"라고 하거나 "가짜 뉴스에 호도되었다"라며 국민의 이성을 깎아내린다. 심지어 사과한다는 말이 고작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다"라는 변명이다. 겉으로는 자책하며 고개를 숙이는 척하지만, 그 말의 기저에는 오만한 우월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눈높이를 맞춘다'라는 말 자체가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시선, 즉 어른이 미숙한 아이를 대할 때나 쓰는 시혜적이고 교만한 발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권력의 훈계를 들어야 할 철부지가 아니다. 몽둥이 뒤에 숨은 폭력을 응시하고, 빈 밥그릇의 무능을 심판하며, 권력의 위선을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심판관이다. 오지 않는 민심을 탓하기 전에, 제 손에 들린 몽둥이와 빈 곳간, 그리고 혀끝에 밴 오만부터 반성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