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첫 비행기 오른 128명…11년간 1만 1,000여 명 서독행
월급 80% 쪼개 고국 송금… 총수출 2% 지탱한 '100% 순수 외화'
시신 수습 애환 딛고 체류권 쟁취까지… 5만 재독 한인의 뿌리로
1966년 1월 30일 일요일 오후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서울 김포공항 활주로에 제트기 굉음이 울려 퍼졌다. 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128명의 젊은 한국 간호사들이 눈물범벅이 된 가족들의 손을 놓고 서독행 일본항공 전세기에 올랐다.
"엄마, 내가 돈 벌어서 꼭 빚 갚아줄게. 누나가 동생들 대학은 꼭 보낼게." 스물두 살 앳된 딸들이 품은 다짐이었다. 이틀 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린 이들은 마인츠 대학병원 이수길 박사의 권유로 오색찬란한 한복을 차려입고 낯선 땅에 첫발을 디뎠다.
전쟁의 상흔으로만 기억되던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백의의 여성들을 보며 현지 언론과 시민들은 플래시를 터뜨리며 '동양에서 온 천사'라 환호했다. 올해로 꼭 60년을 맞은 파독 간호사 파견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환호 뒤 찾아온 냉혹한 현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 실업률 23%에 달하던 조국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바다를 건넌 청춘들은 결코 나약한 희생양에 머물지 않았다. 가부장적 현실을 넘어 선진 의술을 배우고 넓은 세계로 도약하려는 당대 최고 학력 여성들의 용기 있는 도전이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민간 알선으로 물꼬를 튼 독일행은 1966년 정부 주도로 공식화됐고 1976년까지 11년간 무려 1만1천57명의 간호요원(간호사 및 간호조무사)이 서독으로 향했다.
파독 광부(7천936명)보다 3천명 이상 많은 숫자였다.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정부가 1966년 '간호조무사' 직종을 한국 의료 역사상 최초로 신설했을 정도로 거대한 물결이었다.
그러나 환호 뒤에 찾아온 현실은 냉혹했다. 병실 배치가 끝나자마자 들이닥친 언어 장벽과 지독한 고립감, 인종차별적 시선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무엇보다 갓 스물을 넘긴 여성들에게 사망 환자의 차가운 시신을 닦고 수습하는 일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이자 충격이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1년이 지나자 '이건 우리가 해야 할 숭고한 일'이라는 사명감이 생겼다"는 한 원로 간호사의 회고처럼 한국 간호사들은 현지인들이 기피하던 중환자실과 야간 당직, 정신병동을 묵묵히 지켜냈다.
서독 노동법에 따라 독일 간호사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쌓아 올린 철저한 직업의식과 선진 간호 기술은 현지 의료진의 탄성을 자아냈고, 병원마다 환자들의 절대적 신뢰를 받는 '코리안 엔젤'의 신화를 썼다.
그 고된 노동의 대가는 고스란히 조국의 젖줄이 됐다. 당시 이들이 받은 월급은 야간·위험수당을 합쳐 약 700마르크(한화 약 14만5천원~15만원)로 국내 간호사 임금의 5배이자 장관급에 맞먹는 거금이었다.
◆한국 전체 수출액의 2%
간호사들은 기숙사 식당에서 향수병을 달래며 오렌지 한 알을 입에 넣으면서도 고국의 가난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울었다. 매달 손에 쥔 돈의 70~80%를 고국의 부모와 동생들에게 송금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1965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근로자들이 조국으로 보낸 외화는 총 1억153만달러에 달했다. 당시 대한민국 전체 수출액의 약 2%를 지탱한 거액이었다.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 수출하던 경공업 제품과 달리 이들이 타국에서 흘린 피땀은 원가 공제가 전혀 없는 '외화 가득률 100%'의 순수 외화였다.
국제사회에 내세울 것 하나 없던 전쟁 잿더미의 나라에서 이들이 매달 꼬박꼬박 부쳐온 성실한 땀방울은 곧 대한민국의 가장 확실한 '국제 신용 보증서'가 됐다.
시련은 또다시 찾아왔다. 1973년 오일쇼크로 서독 경기가 얼어붙자 1977년 서독 정부는 외국인 간호사 강제 송환 정책을 폈다. 뮌헨에서 17명의 간호사가 집단 해고되자 한국 간호사들은 침묵 대신 연대를 택했다.
"단물이 빠지자 버리려 한다"며 간호복 한쪽 소매를 뜯어내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의 헌신을 지켜봤던 독일 의사와 환자, 시민 1만1천여 명이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노동력을 불렀더니 사람이 왔다"는 독일 사회의 깊은 반성을 이끌어내며 무기한 체류권을 쟁취해 냈다. 한시적 계약 노동자에서 당당한 '독일 시민'으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한 순간이었다.
이후 파독 광부들과 가정을 꾸리며 오늘날 5만여 명 규모의 재독 한인 사회에 뿌리를 내린 이들은 1985년 재독한인간호요원회(현 재독한인간호협회)를 창립하고 민주화 운동과 민간 외교의 버팀목으로 활약했다.
가난을 등지고 떠나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스스로의 존엄까지 증명해 낸 1만1천여 명의 백의의 영웅들. 백발이 돼 고국을 다시 찾은 이들의 거친 손등 위에 대한민국은 영원히 갚지 못할 빚과 무한한 존경을 빚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