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사망했다는 루머는 일단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김정은 위원장은 24일 신압록강대교를 건너 중국 랴오닝성 단둥을 전격 방문했다.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와도 만난 것으로 파악됐다. 국가정보원도 앞서 김정은 위원장의 사망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더욱이 김정은 위원장은 방중 직전인 22~23일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제3차 중대장대회를 직접 주재한 모습까지 북한 매체를 통해 공개됐다.
며칠 전까지 온라인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미 사망했다"는 주장이 퍼졌지만 해외 일정까지 직접 소화하며 건재를 드러낸 셈이다.
그러나 음모론은 이쯤에서 좀체 끝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중국에 나타난 사람이 진짜 김정은이 맞느냐"는 또 다른 의심이 따라붙고 있다.
이른바 '대역설', 일본식 표현으로는 '카게무샤'(影武者)설이다.
◆카게무샤=권력자의 '그림자 무사'
카게무샤는 한자로 '그림자 영'(影), '무사 무'(武), '사람 자'(者)를 쓴다. 말 그대로 '그림자 무사'다.
일본 전국시대처럼 암살과 전쟁이 일상이던 시대에 영주나 장수와 외모가 비슷한 사람을 대신 내세워 적의 눈을 속이거나 지도자의 생존·사망 여부를 감추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알려져 있다.
이 표현을 현대 대중문화에 각인한 작품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80년 영화 '카게무샤'다. 영화에서는 전국시대 다케다 신겐이 치명상을 입은 뒤 자신의 죽음을 3년간 비밀로 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후 신겐과 외모가 닮은 좀도둑이 대역이 돼 살아 있는 영주처럼 행동한다.
처음에는 가짜에 불과했던 인물이 점차 자신이 흉내 내는 권력자의 모습에 빨려 들어가는 이야기다. '카게무샤'는 198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공동 수상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높이 평가했던 조지 루커스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도 제작 성사에 도움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이어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정치 지도자의 대역설이 불거질 때마다 '카게무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데 이 영화이 남긴 영향력이 상당하다.
◆대역은 영화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게 영화 안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 권력자나 군 지휘관의 대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허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코퍼헤드 작전'이다. 영국 배우 M. E. 클리프턴 제임스는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그의 대역을 맡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제임스가 몽고메리처럼 분장한 채 지브롤터와 북아프리카에 모습을 드러내 독일 정보기관의 판단을 흐리도록 한 것이다. 지도자의 생명을 대신하는 대역이라기보다 적의 정보망을 속이기 위한 군사적 기만이었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에게도 대역설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전후 공개된 영상 속 인물들이 모두 같은 사람인지가 국제적인 논쟁거리가 됐고, 사담 후세인의 암살을 준비했던 정보기관들이 그의 정확한 동선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다만 사담 후세인의 대역이 언제, 얼마나 실제로 투입됐는지는 지금도 과장과 확인된 사실이 뒤섞여 있다.
◆케네디 암살이 남긴 충격 "지도자를 저렇게 노출해도 되나"
현대의 대역설을 이해하려면 최고지도자의 암살 역사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1963년 11월 22일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자동차 퍼레이드를 하던 중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지붕이 열린 차량에 타고 시민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현직 대통령도 공개행사 도중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워런위원회는 리 하비 오즈월드의 단독 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이후 마피아, CIA, 쿠바, 소련, 미국 정부 내부까지 수많은 음모론이 뒤따랐다.
케네디 암살은 대통령 경호 체계를 크게 변화시킨 사건이기도 했다. 최고지도자를 국민에게 가까이 보여주는 것과 그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 사이에 근본적인 긴장이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도자 경호가 강화돼 실제 인물을 가까이서 보기 어려워질수록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이 정말 본인인가"라는 또 다른 의심이 생길 여지도 커진다.
◆60년 뒤 아베도 총격 사망…암살은 과거형 아닌 현재진행형
2022년 7월 8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나라현에서 선거 지원 연설을 하던 중 총격을 받고 숨졌다. 범인은 사제총을 이용해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당시 현직 총리는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경호 체계를 둘러싼 대대적인 검증이 이뤄졌다. 거대한 테러조직이나 전문 저격수가 아니라 개인이 만든 총과 비교적 단순한 접근으로 전직 총리가 살해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케네디 암살로부터 약 60년이 지났지만 최고위 정치인의 공개행사가 여전히 극도로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한국도 예외 아냐…朴 저격미수로 육영수 피살, 박근혜·이재명도 피습
한국 정치에서도 최고지도자와 유력 정치인을 겨냥한 공격은 반복됐다.
가장 비극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이다. 문세광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쐈지만 암살에는 실패했고, 대신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탄을 맞아 숨졌다. 대통령을 겨냥한 공격이 결과적으로 대통령 배우자의 사망으로 이어진 비극이었다.
32년 뒤인 2006년 5월 20일에는 부모의 비극을 몸소 겪었던 장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신촌에서 지방선거 지원유세 도중 흉기에 피습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오른쪽 얼굴에 약 11㎝ 길이의 상처를 입어 수술을 받아야 했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는 대통령을 노린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딸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훗날 유력 정치인 신분으로 공개유세 현장에서 공격을 받은 것.
이어 2024년 1월 2일에는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이 부산 가덕도를 방문하던 중 목 부위를 흉기로 공격당했다. 범인은 지지자인 것처럼 접근해 이재명 당시 대표를 공격했고 이후 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육영수 여사 피살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 피습까지, 한국 역시 공개 정치활동을 하는 지도자와 유력 정치인이 실제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이런 실제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의 안전을 위해 대역을 사용한다는 발상 자체가 한국 국민들에겐 완전히 허무맹랑하게만 들리지 않는 측면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을 바라보는 의구심도 거기서 파생된 셈이다.
◆김정은만큼 '카게무샤' 관심 많은 일본
김정은 위원장의 대역설을 유독 꾸준히 다룬 곳 가운데 하나가 일본이다.
북한의 미사일과 납북자 문제 등이 직접적인 안보·국내 정치 현안으로 연결돼 있는 일본에서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건강과 후계구도에도 높은 관심을 보여왔다. 때문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외모가 조금만 달라져도 일본 매체에서는 체중과 귀 모양, 얼굴 주름, 헤어스타일까지 비교하는 기사가 등장하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1년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눈에 띄게 살이 빠진 모습으로 북한 정권수립 기념행사에 등장하자 일본 주간지 'FRIDAY'(프라이데이)는 아예 '김정은 카게무샤설'을 검증하는 기사를 내놓았다. 당시 한 전문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과거와 현재 사진을 비교한 뒤 귀의 형태와 오른쪽 눈썹 위 주름 등이 동일하다며 "본인으로 봐야 한다"는 판단을 내놨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뒤 같은 매체에는 정반대 주장도 등장했다. 한국 국방부 정보본부 분석관 출신 인사는 북한 최고지도자 경호조직 산하에 이른바 '대역 연구소'가 존재하며 여러 명의 대역이 준비돼 있다는 탈북자 증언을 소개했다. 귀와 코의 모양 등을 근거로 당시 공개석상에 등장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까지 제기했다.
하나의 매체 안에서도 '본인이다'와 '대역일 수 있다'는 정반대 분석이 연이어 나온 것이다.
◆국정원, 그때도 "김정은 대역설 근거 없다"
그러나 당시 한국 국가정보원의 판단은 달랐다.
국정원은 2021년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약 20㎏을 감량한 것으로 분석했다. 2019년 약 140㎏이었던 체중이 실제로 줄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얼굴 분석과 체중 변화를 추적하는 모델, 고해상도 영상 등을 활용했다고 설명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역을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취지로 선을 그었다. 이 내용 역시 일본 도요게이자이 등을 통해 상세하게 보도됐다.
즉 일본에서는 김정은 대역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반박하는 한국 정보당국의 분석까지 큰 관심을 갖고 다뤘다.
북한이 최고지도자의 건강 정보를 거의 공개하지 않는 만큼 정보의 여백이 커지고,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은 그 빈칸을 각종 가설과 분석으로 채워온 셈이다. 북한이 침묵할수록 가설은 늘어났고, 그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것이 바로 '카게무샤설'이라고 할 수 있다.
◆푸틴은 실제로 "대역 제안받았다"
현대 지도자 가운데 김정은 국무위원장 못지않게 대역설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인물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푸틴 대통령이 공개행사에 등장할 때마다 귀 모양과 턱선, 걸음걸이, 표정 등을 과거 영상과 비교하며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주장이 온라인에서 반복됐다. 크렘린궁은 이를 여러 차례 부인했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 자신도 과거 실제로 대역 사용을 제안받았다고 인정했다는 점이 시선을 끈다. 푸틴 대통령은 2020년 인터뷰에서 2000년대 초 러시아가 테러 위협에 시달리던 시기 안전을 위해 일부 행사에 대역을 내보내는 방안을 제안받았지만 자신이 거절했다고 밝혔다. 다만, '대역 사용을 검토했다'는 건 확인된 사실이지만 '현재 푸틴 대통령 대신 대역이 활동하고 있다'는 건 입증된 바 없다.
◆시진핑도 건강이상설 뒤 어김없이 '대역설'
실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도 김정은 위원장이 겪는 루머와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 공개석상에 일정 기간 모습을 보이지 않거나 걷는 모습과 표정이 달라 보이면 건강이상설이 먼저 등장한다. 그리고 건강이상설이 커지면 "공개된 영상 속 인물이 정말 시진핑인가"라는 대역설까지 이어진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식의 루머도 과거 여러 차례 확산했다. 그러나 상당수는 다른 시기에 촬영된 사진이나 짧은 영상의 특정 장면을 떼어내 근거로 삼은 것으로 확인됐다.
◆트럼프도 피하지 못한 대역설…더 현실적인 건 '암살 위험'
고령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온라인 대역설에서 자유롭지 않다. 공식 행사 영상에서 얼굴의 각도나 체형, 걸음걸이가 평소와 달라 보일 때마다 "대역 아니냐"는 주장이 소셜미디어에 등장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대놓고 활동적인 모습으로 언론 보도를 채우며 대역설을 불식시키길 반복한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는 대역보다 암살 위험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4년 대선 과정에서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 유세 도중 총격을 받아 귀에 부상을 입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미국 대통령 또는 대통령 후보가 공개행사에서 총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
이렇듯 역사를 보면 권력자를 보호하거나 적을 속이기 위해 대역이 실제 활용된 사례는 분명 존재했다. 케네디·육영수·아베 피살과 박근혜·이재명·트럼프 피습처럼 정치 지도자를 향한 공격 위험도 현실이다. 그렇다고 김정은 위원장이나 푸틴·시진핑·트럼프를 둘러싼 현재의 대역설까지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대역의 역사와, 사진 몇 장·걸음걸이·귀 모양을 근거로 확산하는 현대의 음모론은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이번 김정은 위원장 사망설도 방중으로 사실상 무너졌다. 다만 "죽었다"는 주장이 틀리자 곧바로 "그렇다면 저 사람이 진짜인가"라는 의심이 따라붙었다는 점에서, 카게무샤설은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5줄 요약]
▶김정은 위원장 사망설은 공개활동과 중국 단둥 방문으로 사실상 허위로 드러났다.
▶'카게무샤'(影武者)는 권력자의 대역을 뜻하는 '그림자 무사'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80년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몽고메리 장군 대역처럼 실제 군사적 목적으로 대역이 활용된 역사적 사례도 있다.
▶일본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의 귀·주름·체중까지 비교하며 대역설을 반복적으로 분석했지만 국정원은 2021년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케네디·육영수·아베 피살과 박근혜·이재명·트럼프 피습처럼 지도자 공격 위험은 현실이기 때문에, 주요 국가 정상이 대역을 쓴다는 오래된 상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