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때인데 그 식당에는 손님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인장이 기쁘게 맞았다. 오늘 첫 손님이란다. 친구는 말했다. "한두 명 더 불러올걸." 그는 허세를 부렸다. 달랑 두 명인데, 돼지국밥 '특' 두 그릇에 수육을 대(大)짜로 주문했다. 친구는 독특한 식객(食客)이다. '손님 없는 식당'을 찾아다닌다. 예약하거나 줄 서서 먹는 맛집에 열광하는 세태에서 비켜나 있다. 직장에서 혼자 점심을 먹을 때면 조용한 식당에 간다. 때론 동료들을 선동한다. "식당의 맛은 평준화됐다. 그러니 손님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한산한 식당이 최고지." 얼렁뚱땅 같은데, 묘한 설득력이 있다.
맛으로 승부를 건다? 그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 자본이 성패(成敗)를 가른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밑천이 부족한 식당들은 버티기 힘들다. 한 끼의 매출은 누군가의 하루를 살린다. 외로운 식당을 찾는 것은 응원이다.
SNS에서 봤던 미담(美談)이 생각난다. 휴가 나온 군인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계산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누군가 음식값을 대신 내고 갔다. 메모 한 장 남겨두고. "나라를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얼굴 새파란 청년의 인생관이 바뀔 수 있는 순간이다. 내게도 값진 청춘의 기억이 있다. 대학생 시절 학사주점(學士酒店)에서 홀 서빙을 했다. 근무 첫날, 뒷정리를 할 때였다. 주점 사장이 화장실 휴지통을 비우려던 나를 만류했다. "홀 서빙하러 왔지, 화장실 청소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 화장실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알바생 한 명 쓰는 가게의 사장이지만, 큰 나무 같았다. 부모님께 드리라며 가끔 음료수도 손에 들려줬다. 그는 어른과 고용주의 품격을 보여줬다. 그곳을 거쳐간 알바생들은 오랫동안 그와 인연을 이어갔다.
밥 한 끼 팔아주고, 밥값을 내주고,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거창한 일'은 아니다. 언론에 소개될 미담도 아니다. '사소한 선의(善意)'다. 그렇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작은 선의들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한다. 어르신의 폐지 수레를 밀어주는 학생들, 아이들이 길을 건널 때까지 기다려주는 운전자, 택배 기사에게 물 한 병을 건네는 사람, 양심껏 진료하는 의사, 직업윤리를 지키려는 변호사, 사회적 약자에게 친절한 공무원 등은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는 작은 선행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위대한 일은 없다. 다만 큰 사랑으로 하는 작은 일들이 있을 뿐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義人) 10명이 없어서 멸망했다. 예수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곧 인간 존재의 가장 취약한 곳에 있는 이들을 돌본 사람을 '의인들'이라고 불렀다. 의인은 타인의 필요에 응답하고, 타자에게 곁을 내주는 사람이다. 큰 기둥만이 집을 지탱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버팀목, 주춧돌도 집을 떠받친다.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다. 무명씨(無名氏)들의 작은 힘들이 모여 세상을 지킨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중략)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도종환의 시, '담쟁이') 담쟁이의 힘은 연대(連帶)에서 나온다. 여린 잎이지만 서로 의지하면 거대한 벽을 넘는다. 로마 제국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인간은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