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임현락] 가을, 겸재의 시선으로 조선을 걷다

입력 2026-09-21 15:52:14 수정 2026-09-21 15: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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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락 한국화가(경북대 미술학과 교수)

대구간송미술관 전경(위)과 자연 채광의 여백이 돋보이는 지하 로비에서 바라본 외부 차경(아래). (설계: 최문규·가아건축사사무소,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대구간송미술관 전경(위)과 자연 채광의 여백이 돋보이는 지하 로비에서 바라본 외부 차경(아래). (설계: 최문규·가아건축사사무소,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위) 겸재 정선,
(위) 겸재 정선, '한수주유(漢水舟遊)' 중 광진(廣津), 비단에 채색, 1740~1741년, 간송미술관 소장. (아래) 필자가 직접 촬영한 오늘날의 광진 전경. 아차산 아래 아파트와 천호대교, 광진교가 나란히 보인다.
겸재 정선,
겸재 정선,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 비단에 채색, 110.5×73.6cm, 간송미술관 소장. 가을을 맞은 금강산의 전경을 거대한 화폭에 압축해 담아낸 겸재 진경산수화의 기념비적 역작이다.
겸재 정선,
겸재 정선, '만폭동(萬瀑洞)', 종이에 수묵담채, 간송미술관 소장. 만 갈래 폭포의 물줄기와 바위산의 강렬한 필치가 하나로 어우러져 시각적 웅장함을 전한다.
임현락 한국화가(경북대 미술학과 교수)
임현락 한국화가(경북대 미술학과 교수)

가을의 문턱, 대구 간송미술관으로 설레는 걸음을 옮긴다. 산지형을 살린 외관과 박석마당의 아름드리나무 기둥을 보며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품었던 풍경의 호흡을 떠올린다.

미술관 안으로 발을 디디면 동선은 자연스럽게 지하로 이어진다. 계단을 내려가 마주한 커다란 로비는 자연채광의 환한 여백으로 공간을 활짝 열어 놓았다. 간송(澗松)의 신념과 어우러진 소나무와 곳곳의 차경(借景)을 통해 자연을 품은 건축가 최문규의 안목이 탁월하다.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조선의 눈으로 조선을 그리다'로, 간송 소장품과 삼성문화재단, 국립중앙박물관, 개인 컬렉터의 비장품까지 총 216점이 탄생 350주년을 기념해 모인 대규모 기획전이다.

전시실에서 조선의 시간과 마주하는 순간, 혼백처럼 살아 숨 쉬는 진경산수화의 향연에 숨이 멎는다. 한수주유(漢水舟遊)로 시작해 금강산 절경에 이르러 폭발하는 겸재의 붓질은 조선 산수의 형세와 흐름을 그만의 호흡으로 기막히게 그려냈다.

18세기, 조선 성리학은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주체적으로 사색하여 외래 사상을 '우리의 삶과 정신'으로 완벽하게 체화(體化)했다. 전시 마지막 벽면에 화성(畫聖)으로 추앙한 최완수 선생의 글귀처럼, 겸재 정선은 그 지적 자존감을 붓끝으로 실천하여 조선의 진짜 산천을 독창적 진경(眞景)으로 꽃피워냈다. 중국의 틀을 벗어나 조선 고유의 바탕과 주체적 아름다움의 선언이었다.

우리 그림을 강의할 때마다 진품을 볼 곳이 없어 항상 서울로 학생들을 보내곤 했다. 이제 영남의 독자들이 이곳에서 유감없이 마주하게 됐으니, 소외됐던 대구의 안목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셈이다.

학창 시절 성북동 간송미술관 보화각(葆華閣)에서 공부할 당시 같은 전시가 열렸을 때, 관람객 행렬이 도로 너머까지 줄지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젠 외지에서도 많은 이들이 모여들고 있다. 문화로 나라를 지키던 '문화보국(文化保國)'의 정신이 이제 이곳 대구에서 새로운 문화적 기틀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이 전시가 새삼 절박한 희망으로 다가오는 것은, 강대국의 패권 사이 우리 현실이 과거 조선의 격동기와 닮아 있다는 기시감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고유한 문화와 국가적 자존을 세울 절호의 기회다. 간송의 혜안과 후학들의 정성이 이리로 이끌었듯, 문화 유전자를 주체적으로 세울 준비는 바로 지금이다.

전시 오픈 행사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 "이런 전시는 50년 뒤 겸재 탄생 400주년에나 다시 볼 수 있겠군요." 50년 후면 우리는 세상에 없다. 이 시간을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마음속 작은 스케치북에 거장의 붓질을 따라 우리 산천의 흐름을 눈으로 그려 보라. 그 순간, 세상의 풍경이 다르게 보이고 문화의 유전자가 새롭게 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