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을 고요하게 덮은 눈처럼
수십 겹의 색층을 덮은 미색의 회화
11월 10일까지 윤선갤러리
보는 순간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처음엔 크게 다가오지 않더라도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있다. 캔버스를 빼곡히 메운 표현으로 관람객을 압도하는 작품이 있고, 수많은 붓질보다 빈 여백이 오히려 많은 얘기를 담고 있는 작품도 있다.
김미경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보면 온통 미색에 가까운 화면만이 눈에 들어온다. 첫 인상에 당황할 수 있으나, 들여다볼수록 그 속에는 조각보를 닮은 그리드가, 수십 겹의 색층이, 하늘이, 대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오래 머물며 찬찬히 보게 되는 작품. 김미경 작가만이 가진 작품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개인의 서사가 인간의 근원, 우주로 확장
그가 지금과 같은 작업을 시작한 것은 미국 뉴욕에서 공부하던 시기다.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한 이후 어릴 적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꿈을 이루려, 세계 3대 디자인 학교로 불리는 뉴욕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 대학원에 진학했다.
작가는 "당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어머니였다"며 "어머니는 자식 셋이 인생의 전부였던, 악전고투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한국에 두고 먼 나라에 공부를 하러 왔으니, 다시 한 번 그의 인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보이는 오른쪽의 그림 3점은 바로 그 기억과 감정에서부터 완성한 작품이다. 연필로 빼곡하게 쓴 숫자 1·2·3과 원소 기호 C·N·H·O가 마치 바람에 흩날리듯, 모였다가 흩어진다.
처음에는 숫자 1·2·3만을 반복해서 썼다. 자식 셋이라는, 어머니가 경험했던 제한적인 삶의 조건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어머니는 잘 못배우셨기 때문에 글자도, 세상도 잘 모르셨을거예요. 오로지 세 자녀만 알고 살아온 삶은 어떨까 하며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던 작업입니다. 낯선 곳에서 어려운 여건을 견디며 살아가는 제 삶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요.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면서 기록하다보니,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 것 같아요."
이후 작품에 등장한 'C·N·H·O'는 그러한 질문이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된 결과다. 작가는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책을 읽다가 C·N·H·O, 즉 탄소·질소·수소·산소가 우주와 인간을 구성하는 주요 원소라는 사실에 새롭게 주목했다.
그는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기본적으로 구성하는 물질이 같다는 사실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며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가 우주의 얘기와 만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숫자와 원소 기호를 써가는 과정이 축적되며 우리 삶과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쓰여진 글자들이 왠지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것이, 삶의 허약함과 허무함과도 닮아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삶의 조각 모아 정갈하게 펴낸 그리드
작가의 작품들은 이처럼 자신의 기억과 감정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드가 드러나는 작업의 경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담겼다. 집에 가구가 많지 않았고 보자기에 물건들을 싸서 층층이 쌓아두던 기억. 그 보따리들은 그에게 언제든 이사를 떠날 수 있다는, 어딘가에 마음을 내려놓기 힘든 불안과 슬픔, 고통을 의미했다. 그러다 뉴욕에서 귀국한 어느 날, 인사동에서 마주한 보자기 조각보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픈 기억으로 가득했던 것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다가올 수 있을까 감탄했어요.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그리드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드 회화의 맑고 은은한 색감은 단순히 몇 번의 붓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최소 50겹 가량의 얇은 색이 올려지고 깎이며 층을 형성해나간다.
그는 "지구에서의 이 삶에 발을 굳건히 잘 디디고 살자는 위로의 마음으로 '대지의 색'을 먼저 쌓고 샌딩한 뒤, 그 대지 위에 올려진 세상의 색을 쌓는다"며 "그렇게 쌓아나가다가 내가 새롭게 느낀 아름다움의 색, 사색의 색으로 마무리를 짓는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매끈하면서도 따뜻한, 도자기처럼 독특한 물성으로 마무리된다. 가장자리에는 층층이 쌓인 색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저 밝은 색이 아니라 그 아래 수많은 색들이 빛을 발하는, 온 세상을 덮은 고요한 눈 같은 색인 셈이다.
작가는 "강렬한 색을 썼을 때의 힘도 있지만, 은은한 색은 훨씬 천천히 다가오면서 오래 머무는 것 같다"며 "겉으로 보이는 색은 고요하지만 그 아래 수많은 색들이 받쳐주기 때문에 힘 있게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드 작업을 하다보니, 삶도 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뚫려 있더라도 또 다른 기억과 경험의 조각으로 이어가며 자신을 이해해 가잖아요. 마음을 정갈하게 펴서 갈무리한 상태를 그리드로 여기고 표현하고 있어요."
◆"내 작업은 은은하게 서로를 비추는 내면의 조각들"
'윤동주의 하늘' 연작 일부도 전시됐다. 어느 날 윤동주문학관을 찾은 작가는 그곳에서 본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고작 20대 후반의 나이에 옥사하셨더라고요. 제 마음속에 윤동주는 어릴 때부터 봐서 그런지 굉장히 나이가 많은 시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너무 아름다웠어요. 순간 윤동주가 이 하늘을 얼마나 다시 보고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날 작가는 '윤동주의 하늘'이라는 제목을 마음속에 품었다. 그리고 작은 캔버스에 하나씩 하늘을 그려 붙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60점이 넘는 작품으로 이어졌다. 윤동주가 보고 싶었을 하늘, 매일 작가가 올려다보는 하늘, 고려청자의 옥색을 품은 하늘까지. 작가가 그려낸 투명하고도 깊은 색의 하늘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가 윤선갤러리(대구 수성구 용학로 92-2)에서 선보이고 있는 대구 첫 개인전 제목은 '비추다'. 작가는 수많은 조각과 색의 층, 개인의 기억과 타인의 마음이 서로 관계를 맺고 내면에서 서로를 비추는 모습을 떠올리며 제목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제 작업 세계나 과정이 함축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어요. 무수한 마음의 조각과 이야기들이 모아져 내면에서 은은하게 올라오고, 그것이 서로를 비추며 밖으로 드러나는 것, 그런 마음을 담았죠."
전시는 오는 11월 10일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