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구원 서사] 800조원은 약속했지만, 6.3GW는 어디서 오나

입력 2026-08-28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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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약속은 지역을 구할 수 있을까

이재명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업 투자계획 발표 후 손을 잡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는 구원해봤다. 너희는 구원할 수 있느냐?" 대한민국이 지역을 발전시키는 '거대한 약속'은 주로 경제 분야를 매개로 이뤄졌다. 왼쪽은 20세기 산업화 시대의 세 거인으로 불린 박정희 대통령,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오른쪽은 21세기 AI(인공지능) 및 반도체 기반 산업 지도 재편에 나선 이재명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들은 이미 증명된 세 거인의 성과에 도전장을 내민 셈이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대한민국 지역발전사(史)는 국가가 지역에 거대한 약속을 건네는 역사였다. 1962년 한국 최초 특정공업지구 울산공업지구(현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 지정과 1968년 한국 최초 제철소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은 산업화의 약속을 도시의 성장으로 연결시켰다. 이런 국가 주도의 지역개발이 전국 곳곳에 불을 밝혀나갔다.

하지만 이후 추진된 공항·산업단지·국제행사·기업 유치가 모두 동일한 결말에 이른 건 아니다. 유치 실패 후 과잉 홍보만 꼬리표로 남은 사업이 있었고, 유치에 성공하고도 재정 부담과 유휴시설을 떠안은 '승자의 저주'도 나타났다. 거대한 규모가 지역의 구원을 보장한 게 아니라, 약속을 산업과 고용, 지속 가능한 운영구조로 바꿨는지가 성패를 갈랐다.

2026년 하반기 대구경북은 다시 갈림길 앞에 섰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9월 정기국회에서 TK행정통합특별법을 처리해 대구경북신공항과 국책사업의 추진력을 높인다는 구상이다. 같은 시기 윤곽이 나올 것으로 알려진 2차 공공기관 이전에서도 지역 산업과 연계된 기관들을 유치해야 한다.

그런데 기회가 클수록 "이것 하나만 성사되면 지역이 살아난다"는 '구원 서사'의 유혹도 강해진다. 발표와 협약이 실제 투자로 이어지는지, 재원·권한·책임의 빈칸이 제대로 채워지는지, 사업이 지역에 무엇을 남기고 어떤 부담을 넘기는지 따질 필요가 있다.

구원 서사는 대구경북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선 최근 정부가 AI(인공지능) 및 반도체 기반 산업 지도 재편과 함께 지역 살리기 취지로 제시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에서 확인된다.

[그래픽]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부지 (서울=연합뉴스) 원형민 기자 = 청와대는 7월 6일 정부가 발표한
이재명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업 투자계획 발표 후 손을 잡고 있다. 연합뉴스

◆800조보다 6.3GW

3대 메가프로젝트는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수도권 집중 첨단산업을 전국으로 확산한다는 구상이다.

반도체 분야에서 800조원 규모 기업 투자를 통해 메모리 반도체 팹(Fab, 생산공장) 4기를 구축하는 서남권이 가장 주목됐다. 그런데 800조원은 투자 완료액이 아니라 장기간 집행될 기업 계획이다. 팹 4기에는 6.3GW(기가와트)의 전력과 하루 65만t의 용수가 필요한데, 아직 확보된 현실이 아니다. 발전원·송전선로·취수원·도수관로·초순수 시설의 입지와 비용, 인·허가와 완공 시점도 마찬가지.

문제는 전력과 용수 공급이 팹 건설 일정에 맞지 않으면 기업은 리스크를 줄이려 착공 연기와 투자 규모 재검토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후폭풍의 씨앗이다. 팹 규모가 축소되거나 착공이 밀리고 협력기업 이전까지 흔들리면, 서남권 주민들은 "800조원 중 실제 집행된 돈은 얼마인가"라고 지역 정치권에 물을 수밖에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메가프로젝트 민관합동 제2차 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픽]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부지 (서울=연합뉴스) 원형민 기자 = 청와대는 7월 6일 정부가 발표한 '3대 메가 프로젝트\ 중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과 관련해 광주 군 공항 부지에 산단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전격전'이 만든 새 물음표

이런 불확실성에도 정부는 사업 일정을 더 앞당기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달 10일 3대 메가프로젝트 2차 민관합동 점검회의에서 "속도전을 넘어 전격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광주 군공항 기능을 2028년 중순까지 다른 군공항으로 임시 배치해 부지를 조기 활용하고, 산단 조성과 관련 절차를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라고 주문했다. 전력·용수 공급과 법령 정비에도 속도를 내라고 했다.

대통령의 속도 강조는 이해가 된다. 반도체 산업은 투자 시기와 공급망 선점 경쟁이 중요하고 일본 구마모토 등 경쟁 지역도 이미 움직이고 있어서다.

다만 '전격전'이라는 표현은 새 물음표를 낳는다. 군공항 이전, 산단 조성, 전력망, 용수, 법령 개정은 서로 얽혀 있지만 비용과 책임은 주체가 각기 다르다. 심지어 광주 군공항 내에 우리 공군 제1전투비행단과 함께 있는 주한미군 공군 제607항공지원작전전대 파견대의 이동조차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를 동시에 앞당기는 게 충분한 설계 뒤의 신속한 집행인지, 미확정 조건들을 한꺼번에 밀어붙이는 건지는 구분해야 한다. 준비된 속도는 장점이나, 준비되지 않은 속도는 문제 발생만 앞당긴다.

지난 7월 13일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로 선정된 전남광주 광산구 광주 군 공항에서 전투기가 날아오르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이튿날 호남 반도체 첨단국가산단 사업 예정지 일원 총 364.19㎢를 2년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메가프로젝트 민관합동 제2차 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빠른 발표, 느린 완성의 함정

대통령이 주문한 '전격전'과 세계적 대형 프로젝트 연구자 벤트 플루비야 코펜하겐IT대학 교수가 강조하는 '빠른 행동'을 비교해보자. 전제가 다르다. 플루비야 교수의 속도는 충분한 설계와 위험 검토를 마친 뒤 실행 시간을 줄이라는 뜻이다.

플루비야 교수가 2023년 2월 발간한 '프로젝트 설계자'(How Big Things Get Done)에서는 136개국 20개 분야 약 1만6천개 메가프로젝트(대형사업)를 분석했다. 계획상 비용·일정 목표를 모두 달성한 사업은 8.5%, 기대 편익까지 거둔 비율은 0.5%에 그쳤다. 대형사업이 계획대로 완성되는 사례 자체가 드물단 얘기다. 또 2014년 논문 'What You Should Know About Megaprojects, and Why'(메가프로젝트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과 이유)에서 "대형사업은 규모가 커질수록 예산 초과·지연이 반복되고,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낙관 편향'이 있어 재정·사회적 비용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이에 "천천히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하라"는 해법을 내놨다. 설계·재원 확정 후 실행에 들어간 뒤엔 예상치 못한 변수에 노출되는 기간을 줄이란 것. 성급한 발표 뒤 계획을 보충하는 방식이 아니라, 충분한 계획 수립 후 신속한 집행이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이 얘기를 3대 메가프로젝트에 적용하면 순서가 분명해진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800조원보다 6.3GW 전력과 하루 65만t 용수의 공급원·노선·비용·완공 시점을 선결지어야 한다. 기업별 투자도 장기 구상과 업무협약, 토지계약, 팹 착공을 구분해 제시할 필요가 있다. 준비가 덜 된 입지에 사업부터 배분하고 전력망과 도수관로를 뒤따라 건설한다면, 발표는 서둘렀지만 진척은 더딘 이상한 프로젝트가 되고 만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7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더 램프 레스토랑에서 열린 글로벌 AI 리더 만찬에서 참석자들과 건배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최태원 SK 회장, 라니 보르카르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하드웨어 사장,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이재명 대통령,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연합뉴스
지난 7월 13일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로 선정된 전남광주 광산구 광주 군 공항에서 전투기가 날아오르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이튿날 호남 반도체 첨단국가산단 사업 예정지 일원 총 364.19㎢를 2년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다. 연합뉴스

◆투자 계획 다음 보고할 것들

대통령이 향후 1년을 '골든타임'으로 규정한 만큼, 정부는 같은 속도로 집행 보고서도 공개해야 한다.

김송년·이상호 산업연구원(KIET) 연구위원은 올해 6월 발표한 '5극3특 체제의 지역산업 전략에 대한 제언'에서 성과 관리를 두고 "단기 투자 유치 실적보다 지역 산업구조 전환 효과를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며 "사업비·투자협약액이 아니라 부가가치, 고임금 일자리, R&D(연구개발) 기능 이전, 지역기업 거래, 인재 정착 등 효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문학적 투자액을 앞세웟던 정부가 이제 공개해야 할 것은 집행 성적표다. 연도별 투자집행액, 전력·용수 공급시설의 공정률, 기업별 토지계약과 착공 시점, 협력기업과 R&D 기능 이전, 지역 일자리 창출 현황 등을 빼곡히 적은 보고서를 국민들에게 꾸준히 검사 받을 일이 남았다. 프로젝트를 발표 전 얼마나 깊이 설계했고 발표 후 얼마나 정확히 집행했는지 '민낯'이 여기서 드러나게 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7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더 램프 레스토랑에서 열린 글로벌 AI 리더 만찬에서 참석자들과 건배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최태원 SK 회장, 라니 보르카르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하드웨어 사장,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이재명 대통령,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