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약속이 남긴 5가지 유형
거대한 약속들 중 어떤 사업은 도시를 만들었지만 어떤 유치는 실패보다 치명적인 불신을 남겼다. 개최권을 따낸 순간부터 막대한 채무 부담이 예고된 행사가 있었고, 목표를 바꿀 때마다 완성 시점이 뒤로 밀리며 효용이 떨어진 사업도 있었다. 이러한 대한민국 현대사 속 구원 서사의 서로 다른 결말들을 살펴보면, 지금 대구경북이 추진하는 대형사업·행사의 운명을 판단할 기준도 선명해진다.
◆도시를 키운 구원
1960년대에 잇따라 만들어진 울산공업지구(현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와 포항제철(현 포스코)은 실제로 도시를 키운 구원에 해당한다.
울산에서는 공장 증가와 인구 유입을 수용하기 위해 산업지대와 주거지, 교통·녹지·공공시설을 함께 설계했다. 포항에서도 제철소를 중심으로 항만·물류·협력업체가 성장했고, 이후 포항공대(현 포스텍)와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가속기연구소 등이 들어서며 생산 기반이 연구개발 생태계로 확장됐다. 공장을 지은 뒤 도시가 따라왔다기보단, 공장과 도시가 함께 만들어진 사례다.
그러나 더 먼 미래까지 보장한 건 아니었다. 포항은 포항제철을 중심으로 성장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기업과 도시의 성장이 함께 둔화하는 위기를 겪었다. 철강산업 자체의 성장이 성숙기에 도달했고 단일 기업에 과의존하는 도시 경제 구조의 문제도 드러났다. 울산 역시 석유화학·자동차·조선 등 제조업 의존도가 높은 점이 산업 다각화를 장기 과제로 부상시켰다.
◆실패보다 깊은 불신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실패는 행정과 정치에 대한 신뢰의 실패로 번진 사례다.
부산은 2023년 프랑스 파리 국제박람회기구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119 대 29로 패했다. 2025년 부산시와 정부가 공동 발간한 백서에서는 과도한 낙관론과 교섭 추진체계의 한계, 정보 공유와 전략 조율 부족 등을 실패 원인으로 분석했다. 현실적인 판세 전망을 제시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된 것에 더해 기관별 활동이 일관된 전략으로 통합되지 못했다는 것.
그럼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막판까지 접전과 역전 가능성을 강조했고, 결과는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구원 서사가 지나치게 컸다. 이 전례 탓에 지자체는 다음에 새로운 약속을 제시할 때 신뢰를 얻기 힘들어진다. 유치 관련 예산 1천217억원이라는 숫자가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채로.
◆'빛' 내려다 '빚' 남는다
전남 영암 F1 코리아 그랑프리와 인천아시안게임은 유치 성공 후 '승자의 저주'를 겪은 대표 사례다.
영암 F1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차례 열렸지만 운영 누적 적자가 약 1천900억원에 달했다. 경주장 건설 등 인프라 구축을 위한 발행한 지방채도 2천900억원 수준이었다. 국내 모터스포츠 시장과 접근성, 개최권료 부담을 충분히 따지지 않은 채 세계적 행사라는 명분과 기대효과가 앞섰고, 결국 대회는 2014년부터 중단됐다. 되려 지자체엔 지우기 힘든 흑역사 꼬리표가 남았다.
물론 현재 경주장에서는 국내 규모의 모터스포츠 행사가 간간이 열리지만, 국제대회 개최를 전제로 지은 시설의 규모와 투입비를 감안하면 사후 활용이 당초 기대에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도 신설 경기장 16곳을 만들었으나 사후 운영은 별개의 문제였다. 경기장 건설에 1조7천224억원이 투입됐는데 27%만 국비로 지원받았고 나머지 1조2천523억원 마련을 위해 지방채를 발행했다. 인천시는 2년 뒤인 2016년 국내 광역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재정 위기 주의 단체'로 지정되는 곤란에 처했다.
'2주 축제를 위해 전국 최악의 빚쟁이 도시가 됐다'는 수식이 언론 보도로 나왔다. 유치 경쟁 땐 관광객·고용·생산 효과를 크게 계산하고 건설비·유지비는 소홀히 보지만, 행사가 끝나는 순간부터 편익은 사라지고 비용은 지방재정에 악성 항목으로 남는다. 개최 자체는 단체장과 정치권이 '빛'(성과)으로 누리지만 현실의 '빚'(채무)은 다음 단체장과 주민 몫이다.
◆진짜 성적표는 폐막 뒤에
2012 여수세계박람회(여수엑스포)는 유치 성공, 행사 성공, 지역 구원이 서로 다르게 평가된 사례다. 행사 자체는 여수의 관광도시 체급을 한층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박람회 개최 부지와 시설 활용 문제는 장기 난제였다. 결국 10여년이 지난 현재 여수엑스포사후활용추진단이 박람회장 마스터플랜을 새로 마련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반대 사례도 있다.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개최 후 행사장은 이듬해인 2014년 순천만정원으로 영구 개장했고, 2015년엔 대한민국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됐다. 박람회 개최 부지가 민첩하게 도시의 관광·생태 명소이자 정원산업 기능으로 업데이트된 것.
여수와 순천의 차이는 행사가 끝난 다음 날부터 운영 주체, 유지 보수 수입원, 지역 산업·생활·환경과의 연결을 얼마나 잘 준비해 실행했는지의 차이다. 구원 서사는 행사 개최 기간보다는 폐막 이후 본격적으로 작성된다.
◆미래를 빌려 연명하다?
새만금은 구원이 계속 미래형으로 연장되는 대표적 사업이다. 1987년 전북 만경강·동진강 하구를 방조제로 막아 조성하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발표돼 1991년 방조제 공사가 시작됐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업의 골자는 농지 마련에서 산업·물류·관광·국제업무·재생에너지·2차전지·스마트도시로 확장됐다. 올해는 로봇·수소 산업과 미래도시 구상이 새 성장 동력으로 더해졌다.
환경과 산업 여건에 맞춰 계획을 고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새만금에선 수정이 때로는 반성이 아니라 덧칠로 작동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질오염과 개발 지연, 2023 잼버리 파행처럼 이미 드러난 실패의 원인과 책임을 결산하기도 전에 새 프로젝트가 다음 장면을 채웠다. 이런 장면이 반복될 경우 새만금은 성공도 실패도 않은 채 장밋빛 청사진을 빌려 계속 연명하는, 좀비처럼 죽지 않는 구원 서사로 해석될 수 있다.
비슷한 구조가 대구경북신공항에서도 나타난다. 20년 전 참여정부 시기에 싹을 틔운 이 사업은 여러 난항이 있었다는 해명에도 불구, 20년째 지지부진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지난 7월 추경호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만난 자리에서 적기 개항엔 뜻을 모았으나 가장 중요한 재원 확보와 추진 방식은 추가 논의 대상으로 남긴 모습이 그랬다.
그러는 사이 대구경북 행정통합이 새 해법으로 등장했다. 행정통합을 먼저 이루면 신공항 사업시행자 문제와 재원 마련 같은 현안도 풀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신공항이 대구경북을 구할 사업이었다면, 이제는 행정통합이 신공항을 구할 사업으로 제시된 셈이다. '구원 서사를 위한 구원 서사'다. 말장난까진 아니더라도, 흡사 증권가 파생상품 같다는 느낌을 준다.
신공항은 애초 과거 행정통합 없이도 완수할 수 있다고 홍보하던 사업이다.
새만금이 신규 성장동력을 계속 덧붙이며 미완성의 시간을 연장했다면, 대구경북신공항은 더 큰 제도 개편을 첨부해 기존 사업의 난제를 미래로 넘길 가능성이 충분히 제기된다. 행정통합 자체가 잘못된 해법이란 얘기가 아니다. 잘만 이뤄내면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 신공항은 이미 너무 많은 절차와 기대가 쌓여 가볍게 되돌리기 어려운 사업이다. 그래서 새 구호를 보태기보다 사업 규모와 재원, 국가·대구시·경북도의 책임, 종전부지 개발수익이 부족할 시 위험 분담을 서둘러 확정하고 시·도민들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다.
◆구원도 중간결산이 필요하다
대형사업은 착수 전 검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추진 과정에서도 비용과 일정, 사업 여건의 변화를 계속 점검하고 필요할 때마다 계획을 보완해야 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올해 5월 발간한 '공공재정 회복'(Restoring Public Finances) 보고서에서 "대규모 공공투자의 장은 반복적으로 일정 지연과 예산 증가에 노출되고, 이로 인해 재정 목표뿐 아니라 공공 신뢰도 훼손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개발 단계에서는 재원을 한번에 확정하기보다 불확실성이 줄어드는 정도에 맞춰 단계적으로 투입하고, 주요 단계마다 전략과 집행계획을 공개하는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공항이 과거 그랬듯 대형사업이 지연되는 원인 중 하나가 이해관계 조정인데, 여기에 드는 비용도 사업비다.
누노 길 영국 맨체스터대 경영대학원 교수·사라 베크만 미국 캘리포니아대 경영대학원의 교수가 2025년 4월 펴낸 '거버넌스 함정에서 벗어나기'(Escaping the Governance Trap)에선 "법과 제도는 주민·정부·투자자 등 폭넓은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요구하지만, 투자자는 비용 효율성을 우선하며 협의에 필요한 비용을 초기 예산에서 누락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 결과 협상이 장기화된다"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시간은 돈'이라는 것. 국내 대형사업에서 늘 관문이 되는 주민 수용성 확보, 지자체 간 역할 조정, 중앙정부와 민간사업자 간 위험 분담은 공사 시작 뒤 해결할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대형사업·행사를 긍정적 언어로 먼저 포장하는 관행과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국민 인식 역시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주민도 유치·개최 자체보다 비용과 책임, 사후 효과를 따지는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
스벤 다니엘 울프 스위스 뇌샤텔대 교수는 올해 3월 발표한 '유산 버리기'(Abandoning Legacy)라는 다소 직설적 제목의 논문에서 대형행사를 언급할 때 관행적으로 쓰는 유산(Legacy)이라는 표현부터 버리자고 제안, "'유산'이라는 표현이 긍정적 결과를 미리 전제하기 때문에 비용과 피해,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부담을 떠안았는지를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꼬집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