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삼국통일전쟁'을 동아시아 국제대전으로 다시 본다
동아시아의 종주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벌인 국제대전
왜 고구려는 668년에 무너졌을까? 고구려는 수나라와 여러 차례 대전쟁을 벌여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이어 645년에는 당 태종이 직접 이끈 10만 대군의 수륙양면 공격도 막아냈다. 그런데 불과 23년 뒤에는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고 700년 이상 존속한 국가가 붕괴했다. 그 원인을 찾는 일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흔히 연개소문 사후의 내분이나 나당연합군의 군사적 승리에서 찾는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왜 고구려가 이 시기에 무너졌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이 전쟁의 기본 성격이 국제대전이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고구려 해양사연구>)
이 전쟁은 약 400년 만에 중국대륙을 통일한 세력이 동아시아의 종주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벌인 국제대전이었다. 제1단계인 고수전쟁, 제2단계인 고당전쟁에 이어 백제·신라·왜까지 직접 개입한 제3단계가 소위 '삼국통일전쟁'이었다. 전장 역시 육지만이 아니라 황해와 강, 해안과 섬에서 동시에 펼쳐진 해륙양면전이었다. 따라서 660년 백제 멸망에서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의 전쟁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린 '삼국통일전쟁'으로만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당에는 제국질서를 동방으로 확대하는 전쟁이었고, 신라에는 생존전쟁이었으며, 고구려와 백제에는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이었다. 여기에 왜까지 참전했다.
7세기 초만 해도 신흥국가인 당나라가 대 고구려 전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북쪽에는 강력한 돌궐이 있었고 중앙아시아에도 여러 세력이 존재했다. 그러나 630년에 당나라는 동돌궐을 무너뜨렸고, 657년에는 서돌궐을 격파해 중앙아시아 동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또한 고구려 서북방에서 '피봇' 역할을 하던 '거란'과 '해(奚)' 등도 점차 당의 변경 질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당에게 유리해지는 상황 속에서 신라와 백제의 충돌이라는 변수가 개입을 시작했다.
◆백제의 공격이 신라를 당으로 밀어내다
642년 백제 의자왕은 김춘추의 사위가 성주인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여러 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이렇게 신라는 서쪽에서는 백제, 북쪽에서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으며 국가적인 위기에 빠졌다. 김춘추는 먼저 고구려로 가서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한강유역의 옛 고구려 영토 반환을 요구하면서 협상은 결렬됐다. 일설에는 이때 김춘추가 왜국으로 건너가 외교행각을 벌였다고 한다. 고립무원에 처한 신라는 결국 서해 너머의 당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유역과 경기만 일대를 확보했는데, 이 공간은 수군을 양성할수 있었고, 특히 남양반도의 당항성은 서해를 건너 중국 지역과 연결되는 국제교통의 문이었다. 신라는 비로소 고구려나 백제의 영역을 거치지 않고 중국지역과 직접 교섭할 수 있었다. 자장, 원광, 의상같은 승려들과 사신단, 그리고 김춘추와 김인문 같은 왕실의 핵심 인물들도 이 길을 이용했다. 그리고 660년 여름에는 이 항로를 이용해 당의 13만 수륙군이 건너왔다. 따라서 고구려가 한강유역과 경기만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것은 단순한 영토 상실이 아니라, 신라와 당이 직접 연결되면서 남쪽에 적대적인 국제전선이 형성될 조건을 허용한 것이었다.
◆나당동맹과 고구려의 방어체제
당나라에게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645년에 태종의 친정을 비롯해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장거리 이동과 병참선의 안정이었다. 당군은 중국 본토에서 요서를 지나 요동의 제1차 방어선을 설사 돌파했다고 해도 다시 압록강 방어체제를 넘어 평양지역까지 진격해야만 했다. 고구려는 산성과 험준한 지형, 광대한 공간을 이용해 당군을 소모시켰다. 바다에서도 요동반도 남부와 장산군도·석성열도 등의 해안·도서 방어체제와 고구려 수군 때문에 압록강이나 대동강 방면으로 직접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와 군사적으로 결합하면 사정이 달라졌다. 신라는 남쪽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하고, 고구려군의 병력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결국 나당동맹은 서로 다른 목적의 전략적 결합이었다. 신라는 생존을 위해 당이 필요했고, 당은 고구려전쟁의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라가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동서 동맹과 남북 연결이라는 해륙 십자형 국제질서가 만들어졌다.
◆660년 백제전쟁―황해가 전쟁의 바다가 되다
650년대 후반 당과 신라는 고구려를 계속 정면공격하기보다 먼저 백제를 제거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660년 음력 7월 소정방은 13만의 수륙군을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항해 황해를 건넜다. 덕물도(덕적도)에서 태자 김법민이 이끄는 신라 서해함대 100척과 합류한 뒤 금강 하구로 진입해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백제군은 금강 방어체제를 이용해 강가 강언덕에서 저항했지만 당군은 이를 돌파하고 사비성을 공격했다.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도 육로로 진격했고, 계백의 결사대는 황산벌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돌파당했다. 백제는 해상에서 들어온 당군과 육상에서 진격한 신라군의 협공 속에 급격히 무너졌다.(<한국해양사연구>)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에도 치명적이었다. 남쪽의 중요한 협력세력을 잃은 반면 당은 황해를 이용한 대규모 병력수송과 상륙작전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660년의 백제전쟁은 황해가 외교와 교역의 바다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의 공간으로 전환되고, 육군과 수군이 결합하는 새로운 전쟁방식이 성공한 사건이었다.
◆황해에서 평양으로―고구려전쟁의 해륙화
백제를 무너뜨린 당은 곧 고구려를 다시 공격했다. 이제 전통적인 요서―요동―압록강의 육상축과 함께 산동―황해―대동강―평양의 해상축이 본격적으로 활용됐고, 신라가 남쪽에서 압박하는 제3의 축까지 결합했다. 660년 말부터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고구려는 임진강 방면 신라의 전방거점인 칠중성(적성면)을 공격하고, 왜국에도 사신을 보내 공동대응을 모색했다. 661년 4월에 소정방은 수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넜다. 8월에는 대동강인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마읍산을 점령한 뒤 평양성을 포위했다. 당 수군은 앞바다의 섬을 교두보로 이용해 수도로 접근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정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방어했고, 설필하력이 지휘한 당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전쟁의 구조가 달라진 것이다. 요동으로 들어오는 육상군, 황해와 대동강으로 진입하는 수군, 남쪽에서 압박하는 신라군이 고구려를 향해 수렴했다. 고구려가 과거 수와 당의 침공을 막을 때 활용했던 광대한 전략적 종심과 적의 긴 병참선이라는 이점도 약화됐다. 전쟁은 육상 중심의 정면전에서 해상수송과 상륙작전, 남북협공이 결합한 해륙복합·다면전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일방적으로 밀린 것은 아니었다. 662년 정월 방효태의 군대는 평양 일대에서 작전을 벌이다 사수전투에서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에게 괴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방효태도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다. 당은 다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남쪽에서 백제부흥군과 왜가 당과 신라의 군사력을 붙잡아두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백제복국전쟁과 663년 백강의 국제해전
백제의 왕성이 함락됐지만 지방의 성과 군사집단까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복신·도침·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복국군이 조직되어 순식간에 200여성을 탈환했고, 이어 여러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왜국도 백제복국세력을 지원했다. 661년 8월에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을 보냈고, 9월에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이 5천명의 군사와 함께 귀국해 백제복국전쟁을 이끈다. 백제가 완전히 사라지면 당과 신라의 세력이 일본열도 가까이 진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남쪽에서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동맹국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 간 공방전이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계속됐다. 이 단계에서 소위 '삼국통일전쟁'은 이미 한반도 내부의 전쟁을 넘어선 국제전쟁이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663년 8월 백강구, 즉 백촌강전투였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해역에서 당나라는 170척으로, 왜군은 1000척이 참여했고, 백제군은 언덕에서 배를 지켰고, 탐라의 수군도 참전한 동아시아 국제해전이었다. 결국 백왜군은 400여 척의 왜선이 불타고, 2만7천여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주했고, 백제 유민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탈출했다. 고구려는 나당세력을 견제할 가능성을 잃었고, 왜도 적극적인 대륙 개입에서 물러났다. 왜국은 나당 수군의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664년에 다자이후(太宰府)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이어 대마도, 규슈, 세토 내해를 거쳐 나라 지역까지 백제식 산성을 구축했고, 당과 화친 교섭을 시도했다.(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밖에서는 고립되고 안에서는 분열되다
이러한 국제환경 속에서 고구려 내부에 치명적인 분열이 일어났다.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아들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대막리지였던 큰 아들 연남생은 당으로 넘어가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왔고, 남쪽에서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로 투항했다.
밖에서는 백제와 왜라는 견제축이 무너지고 당과 신라의 포위망이 좁아지는 위기 상황속에서 안에서는 최고 지배층이 갈라진 것이다. 여기에 고수전쟁 이후 약 70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소모도 누적됐다. 군사를 동원하고 성을 건설·보수하며 군량과 물자를 공급하는 부담은 국력과 백성의 삶을 소진시켰다.
667년 9월 당은 다시 총공격을 시작했다. 이세적이 지휘하는 당군은 요동에서 진격했고 압록강 방어선도 공격받았다. 고구려는 여러 성을 중심으로 저항했지만 내부세력의 이탈까지 겹치면서 방어망이 흔들렸다. 668년 당군은 압록강을 넘어 평양 방면으로 진격했고, 신라군도 남쪽에서 북상했다. 결국 음력 9월. 평양성은 당군의 육상·해상 공격과 신라군의 남방 압박을 동시에 받았고, 성 안의 분열과 이탈까지 겹치면서 결국은 함락됐다.
◆668년―동아시아 국제대전의 한 단계가 끝나다.
고구려의 멸망은 단순한 내분이나 나당연합군의 승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중국대륙과 한반도, 몽골초원과 중앙아시아, 황해와 일본열도의 국제관계가 서로 움직인 동부 유라시아 국제질서 변동의 결과였다. 소위 '삼국통일전쟁'은 실제로 여러 국가와 종족, 육지와 바다가 함께 얽혀 벌어진 동아시아 국제대전의 제3단계였던 것이다. 특히 660년부터 668년까지는 당에 유리한 조건들이 한꺼번에 겹친 짧고 특별한 시기였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라는 두 나라가 사라진 순간, 그들을 공동의 적으로 삼았던 신라와 당의 관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멸망은 동아시아 국제대전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국제질서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었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