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이슈] 스파이는 전쟁보다 먼저 움직인다…작은 정보가 만드는 큰 균열

입력 2026-08-21 12: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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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평택 캠프 험프리스 전경. 자료사진. 연합뉴스
경기 평택 캠프 험프리스 전경. 자료사진. 연합뉴스

최근 국내 곳곳에 위치한 한미 군사시설 주변에서 외국인들의 안보 침해 사건이 잇따라 적발됐다. 경찰은 이달 초 인민해방군 출신 중국 국적자 2명을 일반이적죄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한 명은 전북 군산공항 인근에서 전투기와 관제탑 교신을 불법 도청한 혐의를, 다른 한 명은 경기 평택 캠프 험프리스 주변에서 군장점을 운영하며 내부 직원을 통해 한미연합훈련 자료 등을 넘겨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이들이 수집한 정보가 중국 당국으로 넘어갔는지 등 배후를 수사 중이다.

지난해에는 중국인 조직이 현역 장병에게 접근해 한미연합연습(UFS) 계획과 주요 표적 위치 등을 넘겨받은 사건도 적발됐다. 단순 촬영을 넘어 감청과 내부자 포섭으로 수법이 다양해지고 깊어지는 모습이다.

◆돌아온 스파이의 시대

이에 언론들은 방첩 체계와 현행 간첩죄의 공백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늦었지만 오는 9월 13일부턴 간첩죄 적용 대상을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까지 넓힌 개정 형법이 시행된다. 물론 이 법 개정이 간첩 또는 그에 준하는 행위 발생을 완전히 차단해주지는 못한다.

사실 수법과 장비만 달라졌을 뿐 국가 간 경쟁의 그늘에서 정보전은 계속됐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낯선 건 '스파이'(Spy, 간첩,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이나 상황을 몰래 알아내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가 다시 활개를 치는 오늘이 아니라, 우리가 한동안 스파이를 영화 속 존재처럼 여긴 시간일지도. 냉전 종식 후 비교적 안정된 국제질서에 익숙해진 사이 동서고금 지속해 이어졌던 냉혹한 현실을 잠시 잊었던 셈이다. 국가와 세력이 서로 경쟁한 거의 모든 시대에 첩자는 군대보다 먼저 움직였다.

유방의 책사 진평은 거액의 금을 풀어 초나라 진영에 항우의 중신들이 배신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반간계를 구사한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유방의 책사 진평은 거액의 금을 풀어 초나라 진영에 항우의 중신들이 배신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반간계를 구사한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유방의 책사 진평의 반간계에 넘어간 항우는 핵심 책사 범증을 의심하고 박대한다. 이에 격분한 범증은 귀향길에 병사한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유방의 책사 진평의 반간계에 넘어간 항우는 핵심 책사 범증을 의심하고 박대한다. 이에 격분한 범증은 귀향길에 병사한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항우의 의심, 로마의 참패

고대 병법서 '손자병법'의 마지막 13편이 '용간(用間)', 즉 스파이를 쓰는 법이다. 책을 쓴 손자는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선지(先知)', 즉 상대를 먼저 아는 능력은 귀신이나 계산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얻는다고 강조했다. 향간·내간·반간·사간·생간이라는 5가지 유형까지 구분했다. 정보전이 전쟁의 부수적 요소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였다는 의미다.

기원전 206~202년 초한전쟁 때 한나라 유방의 책사 진평은 용간을 실전에서 보여줬다. 원래 항우 휘하에 있다가 유방에게 귀순한 진평은 초나라 내부 사정과 인물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유방이 형양에서 항우에게 압박받자 그는 이런 강점을 활용, 거액의 금을 풀어 초나라 진영에 항우의 중신들이 배신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반간계를 썼다.

항우는 결국 핵심 책사 범증까지 의심해 박대했고, 격분한 범증은 귀향길에 병사했다. 이 계략 하나로 항우가 패망했다고 볼 순 없다. 그러나 적 지휘부의 신뢰를 흔드는 정보공작이 전쟁의 저울을 움직인 대표 사례인 건 분명하다.

독일 현지 토이토부르크 전투 추정 장소 인근에 세워진 아르미니우스상(헤르만 기념비). 위키피디아
독일 현지 토이토부르크 전투 추정 장소 인근에 세워진 아르미니우스상(헤르만 기념비). 위키피디아

서기 9년 지구 반대편 로마군의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참패도 내부를 잘 아는 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게르만족 지도자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에서 복무하고 로마 시민권을 얻은 동맹군 장교였다. 로마 총독 바루스의 신뢰를 얻은 가운데 비밀리에 반란을 준비, 거짓 정보를 이용해 불리한 장소로 꾀어낸 로마군 3개 군단을 궤멸시켰다. 엄밀히 말하면 전형적인 간첩보다는 배신과 기만에 가까운 사례지만, 적 내부의 행동 양식과 판단 구조를 아는 자가 적으로 돌아섰을 때 낼 수 있는 파괴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
영화 '진주만'(2001)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진주만의 관찰, 노르망디의 기만

1941년 일본군 공습에 앞서 미국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을 대상으로도 거창한 첩보 장비 가동보다 반복되는 관찰이 힘을 발휘했다. 일본 해군 정보장교 출신 다케오 요시카와는 일 외무성 직원 신분을 이용해 오아후섬에서 미 해군 함정의 배치와 입출항을 관찰해 보고했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자료에도 그가 해군 배치와 함정의 도착·출발 상황을 보고했다고 적혀 있다. 가령 군함 1척이 어느 날 항구에 와 있다는 사실은 작은 정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함정이 언제 들어오고 나가는지 관찰을 계속 쌓아나가면 이는 함대의 운용 패턴이 된다.

CIA 분석관 출신 리처즈 휴어 주니어 저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배경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1944년 연합군의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선 반대로 거짓 정보의 축적이 위력을 냈다. 스페인 출신 후안 푸홀 가르시아, 암호명 '가르보'는 독일 스파이로 위장한 영국 MI5(보안국)의 이중간첩이었다. 영국에 27명의 정보원을 거느린 것처럼 가상의 조직을 만들어 독일 측에 진짜와 거짓을 섞은 정보를 지속적으로 흘렸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 전후 연합군의 주력이 파드칼레에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 그림을 만들어냈다. 결국 독일군은 노르망디 상륙을 양동작전으로 믿어 기갑사단 2개와 보병사단 19개를 묶어뒀다. 작은 정보들을 누적시켜 상대가 스스로 잘못된 그림을 완성토록 한 셈이다.

◆암호를 뚫고, 내부를 파고들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자 첩보전은 전장의 관찰과 기만을 넘어 통신망과 조직 내부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미국 해군 통신 전문가였던 존 워커는 1967년 소련 대사관을 찾아가 미 해군의 암호 통신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를 건넸고, 이후 가족과 지인까지 포섭했다. 미 FBI(연방수사국)에 따르면 소련은 그가 넘긴 자료와 암호기술을 활용해 미 해군의 암호 통신을 해독할 수 있었다. 무려 17년 동안 100만건 이상 비밀 전문이 전해졌다. 이는 통신 체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열쇠를 넘긴 것이었다.

1985년부터 소련을 위해 활동하다 1994년 체포된 미 CIA(중앙정보국) 방첩 담당자 올드리치 에임스는 더 깊숙한 단계를 보여줬다. 그는 CIA가 소련 내부에서 운용하던 정보원들을 다수 노출, 일부는 처형됐다. CIA는 에임스를 기관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준 내부 첩자로 평가한다. 담장 밖에서 관찰하고 통신을 들여다보는 단계보다 더 위험한 것은, 담장 안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미국 정보공동체 및 국가안보 정책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에이미 제가트 미 스탠퍼드대 교수 저서
CIA 분석관 출신 리처즈 휴어 주니어 저서 'CIA 심리학'(1999) 표지

◆작은 조각이 큰 그림으로

왜 작은 사진 한 장, 교신 한 번, 고위급도 아닌 사람의 이름과 일정을 일일이 경계해야 하는지는 정보학에서도 설명된다. CIA 분석관 출신 리처즈 휴어 주니어는 1999년 펴낸 'CIA 심리학'(Psychology of Intelligence Analysis)에서 "정보가 조금씩 들어올 경우 개별 조각 하나만으로는 기존 판단을 바꾸지 못할 수 있지만, 여러 조각에 담긴 '누적된 메시지'는 전체로 보지 않으면 약화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1973년 4차 중동전쟁 발생 전 미 정보기관이 그날그날 들어온 정보를 전날 것과 비교하는 데 급급해 축적된 증거 전체를 체계적으로 검토하지 못했다는 사후평가를 사례로 들었다.

미국 CIA(중앙정보국)는 지난 2월 유튜브에 중국군을 대상으로 스파이를 모집하는 중국어 자막 동영상을 올렸다. CIA 유튜브
미국 정보공동체 및 국가안보 정책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에이미 제가트 미 스탠퍼드대 교수 저서 '스파이, 거짓말, 그리고 알고리즘'(2022) 표지

미국 정보공동체 및 국가안보 정책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에이미 제가트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2022년 펴낸 '스파이, 거짓말, 그리고 알고리즘'(Spies, Lies, and Algorithms)을 통해 디지털 시대 정보전에서 공개된 정보의 비중이 커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개 정보와 공개 데이터가 미래 정보활동의 핵심이 되고 있다"며 "비밀(비밀문서 등)은 10년 전보다 상대적 중요성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SNS 사진, 위치 정보, 상업 위성영상, 공개 데이터 같은 게 과거 간첩의 망원경과 수첩 역할을 한다는 것.

결국 달라진 건 도구다. 진평은 소문을 뿌렸고, 아르미니우스는 거짓 정보를 이용했으며, 다케오 요시카와는 함대를 관찰했고, 존 워커는 암호를 넘겼다. 이어 요즘 정보수집자는 스마트폰, SNS, 데이터베이스를 쓴다. 디지털 시대에 수집한 정보의 전달도 쉬워졌고, 스파이 모집이 인터넷 공간에서 이뤄지기도 한다.

과거 병영 밖 첩자와 현대 군사시설 밖 정보수집자는 정보전의 본질을 공통되게 보여준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작은 정보도 축적되면 적의 손에서 하나의 작전 지도로 완성될 수 있다. AI로 생성한 이미지
미국 CIA(중앙정보국)는 지난 2월 유튜브에 중국군을 대상으로 스파이를 모집하는 중국어 자막 동영상을 올렸다. CIA 유튜브

하지만 적의 작은 행동들을 관찰해 모아 패턴을 읽고, 가능하면 내부자를 포섭한다는 원리는 변치 않아 보인다. 군산에선 담장 밖 전파를 들여다봤고, 평택에선 담장 안 사람에게 손을 뻗었다.

역사가 반복해 보여주는 건 스파이 1명이 혼자 국가를 무너뜨린다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다. 더 무서운 교훈은 국가가 대수롭지 않게 흘린 작은 조각들이 적의 손에서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병영 밖 첩자와 현대 군사시설 밖 정보수집자는 정보전의 본질을 공통되게 보여준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작은 정보도 축적되면 적의 손에서 하나의 작전 지도로 완성될 수 있다. AI로 생성한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