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숙 백산 우재룡기념사업회장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자유와 평화는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자신의 안위를 아낌없이 던졌던 선열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그 숭고한 헌신의 역사를 얼마나 깊이 기억하고 있을까.
1910년대 일제의 가장 혹독한 무단통치 속에서도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했던 비밀결사 '대한광복회', 그리고 그 중심에서 끝까지 꺾이지 않았던 우재룡 지사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1915년 8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설된 대한광복회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독특하고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을 거쳐 경북 지역의 대표적 의병 부대였던 산남의진에 이르기까지, 1910년대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전국의 의병 조직은 소멸 직전의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대한광복회는 무장투쟁의 불씨를 다시 지핀 구국의 보루였다. 이들은 스러져가던 의병 투쟁의 정신을 훗날 3·1 독립운동과 의열단 활동으로 면면히 이어주는 결정적인 정신적 가교 역할을 해냈다.
대한광복회 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체계적이었으며, 지식인과 행동가가 조화를 이룬 문무(文武)의 결사체였다. 사령관 박상진은 판사 출신의 엘리트였고, 우재룡과 권영만은 대한제국 군인이자 의병 출신이었으며, 최준과 이복우 같은 자산가들이 재무와 사업을 총괄했다. 이들은 전국 8도에 지부를 두고 만주사령관으로 김좌진 장군을 임명하는 등 국내외를 잇는 거대한 구국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독립의 길은 참혹했다. 1918년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며 사령관 박상진을 비롯한 지도부 다수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비극의 한복판에서도 끝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은 인물이 바로 우재룡 지사다. 그는 이미 산남의진 의병 활동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경술국치 특사로 풀려난 몸이었다. 동지들의 참수와 처형을 목도하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살아남은 동지들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지원 사업을 펼치다 결국 다시 체포되어 1922년 또 한 번의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일제 치하에서 무기징역을 두 번이나 선고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문자 그대로 '백절불굴'의 표상이었다.
우재룡 지사가 1921년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심문을 받으며 남긴 어록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새겨야 할 경구(警句)다. "독립이 가능하다든가, 불가능하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한 바 없다. 조선인으로서 국권 회복을 도모하는 것은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을 도모함은 하늘에 있고, 일을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독립은 '가능한가'의 영역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의 영역이었다. 하늘의 뜻을 구하기에 앞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행한다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는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바랐던 순수한 영혼의 울림이다.
대한광복회가 창설된 지 110여 년이 흘렀다. 그들이 흘린 피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정신적 가치와 '나라를 위한 의무'가 점차 흐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대한광복회와 우재룡 지사가 남긴 불굴의 신념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세대를 넘어 영원히 기억되고 계승되어야 할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정신적 자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