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라이프] 60년 만에 다시 트랙에 서다…전 100m 육상 선수 임을용

입력 2026-08-14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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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구경북 육상 대표주자…전국체전 경북 1위 일등공신
선수 은퇴 후 사업가 변신 "지금 트랙이라면 기록 훨씬 줄였을지도"

1960년대 대구경북의 육상 100m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던 임을용 씨가 대구스타디움 트랙 위에 섰다. 스타트 자세를 잡고 있는 임 씨. 이화섭 기자
1960년대 대구경북의 육상 100m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던 임을용 씨가 대구스타디움 트랙 위에 섰다. 스타트 자세를 잡고 있는 임 씨. 이화섭 기자

아쉽게도 대한민국은 육상의 불모지다. 수영에서는 21세기 들어 올림픽에서 메달을 간혹 획득하지만 육상은 1992년 마라톤 황영조의 금메달, 1996년 마라톤 이봉주의 은메달 이후 메달 소식이 전무하다. 워낙에 신체조건을 많이 타는 운동이기도 하거니와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나 지원이 줄어든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1960년대만 해도 한국 육상계의 분위기가 이정도는 아니었다. 1965년 12월 29일자 중앙일보 8면에 실린 '65년의 스타 플레이어-체육계 결산'이라는 기사를 살펴보면 모두 육상 선수들의 이름이 올라 있다. 당시만 해도 육상 선수들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기사에 올라있는 이름 중 한 사람이 곧 열리는 '2026대구세계마스터즈육상대회'에 출전한다. 당시 남자 고등부 100m와 400m 1위로 전국체전 경북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던 임을용(79) 씨다.

1967년 전국체육대회 육상 400m 달리기에서 1등으로 골인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는 임을용 씨. 이화섭 기자
1967년 전국체육대회 육상 400m 달리기에서 1등으로 골인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는 임을용 씨. 이화섭 기자

◆ 서울과 일본을 꺾은 일등공신

1960년대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만든 경제개발이 시작된 시대이면서 한국 체육의 발전이 태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어도 누군가는 운동장에서 달렸고, 공을 찼다. 그 때의 땀방울이 모이고 모여 지금 대한민국은 그 때는 상상도 못했던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한다. 임 씨가 그런 '누군가' 중 한 명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을 쓰는 게 타고 났다는 걸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달리기를 하면 늘 1등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운동으로 진로를 잡았다. 영남중 재학시절부터 이미 두각을 나타내던 그는 서울 고명상업고등학교(현 고명외식고등학교)로 유학을 갔고 경희대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임 씨의 전성기 시절을 알려주는 두 대회가 있다. 하나는 공식기록이 남아있고 하나는 그렇지 않다.

공식기록이 남아있는 대회는 1968년 지금은 없어진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 49회 전국체전. 당시 경북 육상팀은 임 씨를 포함 5명의 선수를 출전시켰는데 임 씨는 이 때 400m 금메달, 200m 동메달을 획득했다. 두 메달을 포함해서 5명의 선수가 10개의 메달을 쓸어갔는데, 이 메달에 힘입어 경북은 서울을 제치고 전국체전 1위 도시에 올랐다. 임 씨는 "이 덕분에 양택식 당시 경북도지사가 서울시장으로 영전했다"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공식기록을 찾을 수 없는 대회는 1965년 서울과 대구에서 열린 한일육상친선경기. 당시 한국 육상 대표팀과 일본 와세다대학교 육상부의 친선경기가 서울에서 한 번, 대구에서 한 번 열렸다. 당시 출전 선수 중 한 명이 100m 10초10의 기록으로 '아시아의 총알'이라 불리던 이이지마 히데오. 서울에서 먼저 열린 400m 계주에서 일본에게 진 한국 선수들은 대구에서 설욕을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예 의지를 꺾어버리자'는 심산으로 선수를 두 팀으로 나눠서 출전했다.

대구시민운동장(현 아이엠뱅크파크)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임 씨는 한국 팀 마지막 주자였다. 임 씨가 배턴을 받을 때쯤 일본 팀이 앞서나가고 있었다. 추월하기 힘들어 보이던 경기는 임 씨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 경기 결과를 실은 언론 매체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게 임 씨의 주장이다. 임 씨는 "한 지인이 일본에 갔다가 '우연히 스포츠 잡지를 봤는데 관련 기사를 봤다'는 제보를 해서 찾으러 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며 "대한체육회 등 서울 쪽 체육단체들을 뒤져도 관련 기록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

임을용 씨가 오랜만에 육상용 스파이크화를 신고 있다. 이화섭 기자
임을용 씨가 오랜만에 육상용 스파이크화를 신고 있다. 이화섭 기자

◆ "지금 트랙이면 40초는 줄였을 것"

1967년 해군 입대 후에도 해군 스포츠부를 창설해 선수생활을 하던 임 씨는 1971년 제대 후 은퇴를 결심한다. 그 이후에는 개인 사업으로 진로를 선회, 현재는 각종 모터보트를 제작하는 사업체를 운영 중이다. 체육계에 계속 머무르지 않았던 이유를 그는 빠듯한 벌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 씨는 "당시 체육교사나 실업팀 선수 봉급이 먹고살기 힘들 정도로 적었다"며 "고민을 많이 했지만 이미 전성기는 지난 상태여서 트랙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고 설명했다.

60여년 간 떠나있던 트랙 위에 다시 서게 만든 건 "2026대구세계마스터즈육상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35세 이상 육상을 즐기는 생활체육인들이 참가하는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올해 봄에 들은 임 씨는 참가를 결심함과 동시에 '너무 늦게 알았다'는 아쉬움도 함께 느꼈다.

너무 오래 트랙을 떠나있었던 탓에 육상용 스파이크화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달리기를 연습하는 동안 장딴지와 허벅지, 심지어 허리까지 무리가 왔다. 여기에 79세로 75~79세 연령대 참가자 중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다보니 자신보다 젊은 선수들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도 적지 않다.

60년대 인기 종목 중 하나였던 육상이 바닥까지 가라앉은 현실을 바라보는 임 씨의 아쉬움도 크다. 임 씨는 "내가 선수였던 시절에는 아쉬운 체격 조건에다 종목 자체의 선수 생명이 짧은 탓으로 발전이 더뎠다"며 "지금은 트랙도 좋고 선수들 체격 조건도 올라오고 있지만 육상의 인기가 적어서 아쉽다"고 말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대구스타디움에 임 씨가 섰다. 임 씨는 트랙 위에 올라서며 회한 짙은 감상을 말했다.

"제가 선수로 활동하던 때에는 이런 포장된 트랙이 아니라 흙바닥이었어요. 그 흙바닥에서 많은 선수들이 10초 후반대의 기록을 만들었지요. 만약 제가 선수 시절에 이렇게 잘 포장된 트랙에서 뛸 수 있었다면 당시 기록에서 0.45초 정도 더 줄일 수 있었을 거예요. 시절은 좋아졌는데 나는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렸으니 아쉽죠."

"우사인 볼트처럼 포즈를 한 번 해 보세요"라는 기자의 주문에 임을용 씨가 포즈를 잡아보고 있다. 이화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