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성에 투후(秺侯) 김일제 유적 남아 있어
투후보유지, 흉노가 이름까지 남긴 거의 유일한 유적
◆감숙성에 남아 있는 투후 김일제의 유적
2026년 여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는 감숙성 일대를 답사했다. 답사를 함께 한 일행들은 감숙성에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서기전 134~서기전 86)의 유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중국 서북부 감숙성은 고대 흉노의 무대였기에 흉노의 유적이 있을 수는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무려 2천100여 년 전의 인물인 흉노의 태자 김일제의 유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액시(张掖市) 당채향(党寨乡) 신구촌(新沟村)에 있는 투후보유지(秺侯堡遺址)는 중국 북부를 장악하고 한(漢)나라의 조공을 받았던 흉노가 그 이름까지 남긴 거의 유일한 유적일 것이다. '보(堡)'란 작은 성을 뜻하는데 직접 찾은 투후보는 그리 작은 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크기의 크고 작고 보다 '투후(秺侯)'란 이름을 가진 성이 2천100여 년의 세월을 묵묵하게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경이로웠다.
특히 투후 김일제는 한국에서도 김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현재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한족(漢族)이라고 자칭하는 것은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를 뿌리로 삼는 것인데, 그 한(漢) 정사인 『한서(漢書)』에 김일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열전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다. 『한서』 「김일제 열전」은 "김일제의 자는 옹숙(翁叔)이며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열전은 좁게는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지만 넓게는 한족과 흉노족의 서로 양립할 수 없었던 흥망사가 담겨 있다.
◆흉노를 격파한 곽거병
평민에서 일어나 초나라 왕족 후예 항우(項羽)를 꺾고 중원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은 서기전 200년 자신감을 갖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시 부근으로 유추되는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 황제 묵돌선우(冒頓單于)의 군대에게 포위당해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유방의 책사 진평(陳平)이 묵돌의 황후 연지(閼氏)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어 목숨은 건졌지만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조공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재 중국인들이 한 고조 유방 못지않게 한 무제(武帝:재위 서기전 141~서기전 87)를 뛰어난 임금으로 높이는 이유는 조공국 한의 처지를 역전시켰기 때문이다. 유방이 패배한 후 80여년 후인 서기전 121년 한 무제는 곽거병(霍去病)과 위청(衛靑) 등 젊은 장군들을 보내 흉노를 공격했다. 흉노는 황제인 선우 아래에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을 두어 넓은 지역을 다스리게 했는데 김일제는 원래 흉노 우현왕이었던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다. 곽거병은 좌현왕이었던 혼야왕(渾邪王)의 군사를 기련산(祁連山) 일대에서 대파했고, 수만 군사를 잃은 것에 화가 난 선우는 혼야왕을 죽이려고 불렀다. 혼야왕은 휴도왕에게 함께 모반하자고 권했지만 휴도왕이 거부하자 휴도왕을 죽이고 4만여 군사와 함께 항복했다. 이때 과거병은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할 때 사용하던 금인(金人)을 노획했는데, 훗날 한 무제가 김일제에게 '김(金)'이라는 성을 내린 것도 이 금인에서 유래한다.
◆흉노 태자 김일제의 생애
열네 살이었던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는 어머니 연지(閼氏:묵돌의 황후와는 다른 인물)와 동생 김윤(金倫)과 함께 한나라로 끌려가서 말을 기르는 관노가 되었다. 하루는 무제가 후궁들과 함께 말을 검열하는데 김일제만이 후궁들을 힐끔거리지 않고 그가 기른 말이 유난히 뛰어나자 말 기르는 책임자인 마감(馬監)으로 승진시켰다. 김일제는 시중(侍中)·부마도위(駙馬都尉)·광록대부(光祿大夫) 등을 역임하며 무제의 신임을 받았는데 서기 전 88년 망하라(莽何羅)가 무제를 암살하려 하는 것을 몸을 던져 막았고 이후 무제는 김일제는 일가처럼 대우했다. 무제는 김일제를 제후로 봉하려 했으나 김일제는 사양했고, 무제 사후 뒤를 이은 소제(昭帝)는 병으로 위독한 김일제를 투후(秺侯)로 봉했다. 김일제는 봉작을 받은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으나 투후의 작위는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소호와 금인의 관계
『한서』 「위청 곽거병 열전」은 과거병이 흉노 휴도왕의 '제천금인(祭天金人)'을 획득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제천 금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이 있었다. 후대에는 주로 불교의 불상과 같은 것으로 해석했다. 『사기』 「오제열전」은 황제(黃帝)의 맏아들을 '소호(少昊) 금천(金天)'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김씨 성이 나왔다고 보고 있다. 『여씨춘추』에서 고유(高柔)는 소호가 금천씨가 된 유래에 대해서 "금덕(金德)으로써 천하의 왕이 되어서 금천씨라고 불렀으며, 죽어서는 금으로 배향되어 서방 금덕의 신이 되었다"라고 했다. 또 욕수(蓐收)라는 인물에 관해서는 "소호 후예의 아들로 해(該)라고 하는데 모두 금덕이 있어서 죽어서는 금신(金神)으로 제사를 받았다"라고 했다. 『예기』 「월령(月令)」에서 정현(鄭玄)은 "소호는 금천씨이고, 욕수는 소호씨의 아들로 해이며 금관이라고 한다"는 주석을 달았다. 『산해경』 「해외서경」에서 곽박(郭璞)은 욕수를 "금신이다"라는 주석을 달았다. 이처럼 소호와 그 자손 욕수는 모두 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흉노 휴도왕이 금인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사는 동이족인 소호 금천씨나 그의 아들 욕수와 연관이 있을 것임을 말해준다. 흉노는 "매년 5월이면 용정에서 큰 집회를 열고 조상신과 천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금인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금인은 소호나 그 아들 욕수일 가능성이 높다. 흉노 또한 동이족의 한 지파인 것이다.
◆신라의 원시조 소호 금천씨, 중시조 김일제
소호 김천씨나 김일제가 우리에게 큰 관심을 끄는 것은 그와 국내 김씨의 관계 때문이다. 1954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동쪽의 곽가탄(郭家灘)에서 9세기 재당(在唐) 신라인이었던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이 발견되었는데, 소호 김천씨와 투후 김일제가 조상이라고 나온다.
"태상천자 때 나라가 편안했고 그 적장자께서 가문을 여셨는데 호(號) 가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시니 곧 우리 가문이 씨(氏)를 받은 세조(世祖)이시다. ……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이신데, 흉노조정[龍庭]에서 서한(西漢:전한)에 귀순하셔서 무제(武帝)에게 벼슬하셨다. …… 투정후 (秺亭侯)에 봉하셨다."
재당 신라인 김씨의 묘지명에 김씨 가문을 연 원시조가 소호금천씨이며 먼 조상이 김일제라고 기록한 것이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는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 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나라 말기에 요동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유방이 세운 전한(前漢)은 신(新:서기 9~23)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에게 무너지는데 김일제의 증손인 김건(金建)의 손자인 김당(金當)의 어머니 남(南)은 왕망의 어머니 공현군(功顯君)의 친자매였다. 곧 김당과 왕망은 이종사촌지간이었기 때문에 김일제의 후손들은 신나라 조정에서 활약했으나 신나라가 불과 14년 만에 멸망하고 후한이 들어서자 김일제의 후손들은 요동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금으로 이어진 신라 가야 왕실과 김일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의 비문에는 "투후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라고 말하고 있다. 『한서』에서 휴도왕이 금인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그 후예가 투후라는 사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신라 왕실에 그대로 계승된 것이다. 문무왕은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 김문희(金文姬) 사이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의 12대 선조는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이며, 그의 증조부는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왕비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 구해왕(仇亥王)이다. 또 그의 조부는 구해왕의 셋째 아들인 무력(武力)이다. 「김유신열전」에는 "신라 사람이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 일렀기 때문에 성을 김이라고 했는데, 비문에는 또한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라 했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왕은 신라와 성이 같다"라고 했다. 헌원은 바로 오제(五帝)의 첫머리로 소호 김천의 부친인 황제(黃帝)를 뜻하니 신라왕실은 스스로를 황제의 후예이자 소호 김천씨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장액시에 있는 투후보는 한나라 때 흙을 다져 쌓은 판축 토성으로 성 안에는 원래 사당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김일제를 모신 사당일 것이다. 흉노 휴도왕의 제천금인, 금덕(金德)으로 천하를 다스렸다는 소호금천씨, 금신(金神) 욕수, 김일제에게 내려진 '김(金)'이라는 성씨! 서로 다른 시대와 문헌이 '금(金)'과 제천(祭天), 그리고 조상에 대한 기억이라는 공통된 요소를 품고 있다. 특히 요동으로 이주한 김일제의 후손들과 신라 김씨 왕실은 모두 문헌으로 김일제와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다.
◆김씨의 조상 기억은 후대의 창작인가
동이족인 소호의 정체성은 김(金)이라는 성씨에 오롯이 묻어있다. 그리고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조를 잊지 않기 위해 비석이나 묘지명에 자신의 가계를 새겼다. 하지만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학자들은 김씨 성이 6세기 말 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이런 기록들은 김씨들이 가문의 유구함과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 낸 계보라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자료에서 소호금천씨와 김일제에 대한 기억이 반복되고 있는지, 그리고 '금(金)·제천(祭天)·투후(秺侯)'라는 요소들이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신라와 가야의 김씨 계보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함께 설명하지 못하고 부정하기에 바쁘다. 그들의 일본인 스승들이 만들어놓은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하라"는 지시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2026년 여름, 감숙성 장액의 황량한 들판에 남아 있는 투후보의 성벽 앞에 서서 나는 그 오래된 기억을 생각했다. 동이족이 하늘에 제사지내며 조상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 기억을 더듬는 것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