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센터·로봇·방산·선박으로 수요 다변화
LMFP·LMR 등 차세대 배터리 소재 경쟁 본격화
글로벌 배터리 산업이 전환점을 맞고 있다. 고성능·장거리 전기차용 하이니켈 배터리 중심이던 시장이 가격경쟁력과 안전성, 용도별 성능을 함께 갖춘 '고성능 보급형 배터리'까지 다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전기차 캐즘을 배터리 수요의 단순한 후퇴로 보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초기 전기차 시장이 고성능·장거리 차량을 중심으로 성장했다면, 앞으로는 보급형 전기차와 ESS, 산업용 모빌리티 등 용도별로 요구 성능이 달라지는 시장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배터리 산업의 경쟁축도 에너지밀도 일변도에서 가격, 안전성, 수명, 공급망 안정성까지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넓어지고 있다.
배터리 수요도 변하고 있다. 침체기를 겪는 전기차 시장을 넘어서 이제는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에너지저장장치(ESS)를 비롯해 AI 데이터센터, 자율주행 로봇, 방산 드론, 선박 등으로 활용 분야가 넓어지고 있다. 경북도는 포항에 집적된 이차전지 등 배터리 인프라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 '값싼 배터리' 넘어 '고성능 보급형'으로
정부는 지난해 'K-배터리 경쟁력 강화방안'을 발표하고, 리튬망간인산철(LMFP)을 비롯해 미드니켈, 리튬망간리치(LMR), 나트륨 배터리 등을 'LFP plus'로 정의하고 관련 소재·부품·장비 생태계의 조기 구축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전기차 캐즘을 배터리 산업의 쇠퇴가 아니라 용도와 가격대별 시장 재편의 촉진제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그동안 에너지밀도가 높은 하이니켈 NCM 배터리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원료·차량 가격 부담이 커지고 안전성과 수명에 대한 시장 요구가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고 열안정성이 우수한 LFP 배터리의 적용이 확대됐다.
최근에는 LFP의 에너지밀도와 저온성능을 보완한 제품 개발도 본격화되고 있다. LFP에 망간을 더한 LMFP, 니켈 사용량을 낮춘 미드니켈, 망간 비중을 높인 LMR, 리튬 대신 나트륨을 활용하는 소듐배터리 등이 대표적이다.
LFP+는 단순한 저가형 배터리가 아니라 가격과 안전성을 기반으로 에너지밀도와 출력, 수명 등 용도별 성능을 높인 고도화된 보급형 배터리군이다.
앞으로 장거리·고성능 전기차에는 NCM 하이니켈 배터리를, 보급형 전기차와 ESS·AI 데이터센터·산업기기에는 LFP+를 적용하는 포트폴리오 다변화가 빨라질 전망이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도 LFP와 LMFP, 미드니켈 등으로 제품군을 확대하고 있다.
◆ 미국·유럽 공급망 규제…'어디서 만들었나'가 경쟁력
글로벌 배터리 시장의 경쟁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에너지밀도와 충전속도, 가격이 경쟁력을 좌우했다면 이제는 원료와 부품의 조달 경로, 탄소발자국, 재생원료 활용 여부도 중요한 시장 진입 조건이 되고 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외국우려기업(FEOC) 규정을 통해 배터리 핵심광물과 부품의 공급망 요건을 강화하고 있다. 유럽연합도 배터리법과 핵심원자재법(CRMA)을 중심으로 공급망 실사와 탄소발자국, 재생원료 활용 요건을 강화하는 추세다.
국내 기업이 우수한 기술을 확보하더라도 핵심 원료와 중간재를 특정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글로벌 수주와 현지 생산에서 제약을 받을 수 있다. 국내 소재·부품·장비 생태계의 경쟁력이 K-배터리 전체의 공급망 대응력을 좌우하는 구조가 된 셈이다.
배터리 셀 생산은 수요처인 북미·유럽의 현지공장에서 이뤄지는 비중이 커지고 있지만, 소재 개발과 공정 설계, 품질 검증, 차세대 제품 실증은 국내 마더팩토리의 역할이 크다. 양극재·음극재 등 핵심 소재가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개발·생산돼야 해외 셀 공장과 완성차 고객사에 대한 공급 대응력도 높아질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이 LFP+ 양극재와 음극재 생산기술을 확보하더라도 원료와 중간재, 공정장비를 특정 국가에 의존하면 안정적인 양산은 어렵다.
양극재 원료와 전구체, 음극재용 흑연계 중간재는 중국 의존도가 높아 국내 생산과 조달처 다변화가 시급하다. 공침·소성·흑연화 장비와 핵심 부품도 공급망 강화가 요구되는 분야다.
배터리 소재는 원료나 장비가 바뀌면 수요기업의 성능평가와 양산 인증을 다시 거쳐야 한다. 공급망의 한 단계가 막히면 생산 지연과 원가 상승은 물론 납품 일정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포항, 순환형 소재 공급망 기반 갖춰
시장 변화 속에서 철강과 이차전지, 연구개발 기반이 함께 집적된 경북 포항이 주목받고 있다.
영일만일반산업단지는 재활용 원료·전구체·양극재, 블루밸리국가산업단지는 음극재·부품·사용후배터리, 포항철강산업단지는 철강 부산물 원료화와 공정장비·부품 생산기반을 갖추고 있다. 포스텍·RIST·포항가속기연구소의 소재 분석과 연구개발, 시험평가 기능도 이를 뒷받침한다.
포항에는 이차전지 관련 기업 260여 개와 소부장 기업 75개가 집적돼 있으며, 기존 확정투자와 신규 계획을 합친 투자 규모는 2030년까지 약 14조원에 이른다. 관련 연구인력도 3천여 명이다.
기존 양극재 생산기반과 산업 인프라에 LFP+ 원료·전구체·장비·재활용, 실증·인증 기능을 더하면 새로운 기반을 처음부터 구축하는 것보다 투자 효율과 시장 대응 속도를 높일 수 있다. 기존 산업기반 위에 공급망의 빈 고리를 단계적으로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이 포항의 강점이다.
포항의 차별점은 철강산업의 자산을 배터리 공급망에 활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철강 생산 시 발생하는 산세폐액과 망간계 부산물은 황산철·황산망간으로, 콜타르 계열 부산물은 피치·침상코크스 등 음극재 원료로 전환할 수 있다.
또 사용후 배터리와 공정 스크랩에서 회수한 리튬·니켈·망간 등을 다시 소재 생산에 투입할 수 있다. 철강 부산물과 사용후배터리가 다시 배터리 원료로 돌아가는 순환형 공급망은 철강산업의 친환경 전환과 이차전지산업의 원료 자립화를 함께 촉진할 수 있다는 평가다.
◆포항, 개발에서 시장 진입까지 단축
포항에 구축된 양극재와 음극재 생산기반도 LFP+ 전환의 강점으로 꼽힌다.
기존 양산라인과 공정기술, 전문인력과 협력기업을 활용하면 새로운 생산기반을 처음부터 조성하는 것보다 제품 개발부터 실증·양산까지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지역 앵커기업들도 미드니켈·LMR·LMFP 등 LFP+ 제품군 확대에 나서고 있으며, 관련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의 투자와 기술개발도 추진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LFP+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개별 생산설비 지원을 넘어 공급망 전체의 병목을 해소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중국 기업과 단순 가격경쟁을 벌이기보다 고성능 소재와 친환경 공정, 안정적인 비중국 공급망, 신속한 고객 인증을 결합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LFP+는 가격경쟁력이 출발점이지만, 실제 시장 경쟁력은 가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보급형 전기차와 ESS, 로봇·산업기기 등 용도별 시장에서는 낮은 원가와 함께 수명, 출력, 열안정성, 양산 신뢰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개발된 제품을 고객사 인증과 양산으로 빠르게 연결하는 역량도 핵심 경쟁 요소로 꼽힌다. 원료 조달과 공정장비, 시험평가, 고객사 인증 기능이 한 권역에서 맞물릴수록 제품 개발에서 시장 진입까지 걸리는 시간을 줄이고 전환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양금희 경북도 경제부지사는 "전기차 성장률 둔화는 배터리 수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장이 용도별로 다변화되고 있다는 신호"라며 "가격과 안전성에 성능을 더한 LFP+ 기술과 비중국 공급망을 함께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포항은 철강 부산물 원료화와 양·음극재 생산기반, 소부장 기업과 연구개발 인프라가 한 권역에 집적돼 있다"며 "기존 기반 위에 원료부터 실증·양산까지 연결되는 공급망의 빈 고리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