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진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싱어송라이터나 작곡가라는 포지션(또한 '더 클래식' 멤버이자 가수 활동과 병행한 펀드매니저·애널리스트 경력도)을 먼저 떠올린다. '처음 느낌 그대로' '동경소녀' '편지'를 부른 가수, 혹은 이소라의 '기억해줘' 등 여러 히트곡을 만든 뮤지션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 세계를 진득하게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얼굴이 보인다.
작사가 김광진이다. 그리고 음악 세계를 함께 완성한 작사가이자 아내 허승경이다.
이들의 노랫말엔 유난히 사랑의 여러 입장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떠나는 사람, 남겨진 사람, 그리고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까지. 자주 카메라를 돌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비춘다. 그래서 김광진의 노래는 단순한 연애담이 아니게 된다. 사랑을 말하되, 사랑의 주인공만 말하지 않는다. 김광진표 사랑과 이별 노래의 '화자(話者)론'이 도출된다.
가장 먼저 거론하면 좋은 작품은 아내 허승경이 작사한 '편지'(2000, 3집 'It's Me')다.
◆연적을 어루만진 편지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김광진이 떠나는 연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쯤으로 생각한다. 알려진 사연은 다르다. 김광진이 아내를 두고 경쟁했던 한 남성이 남긴 편지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전해진다. 결국 김광진이 선택됐고, 연적(戀敵)이었던 상대 남성은 그 선택을 받아들여 유학길에 올랐다.
이야기엔 세 사람이 있다. 선택한 사람, 선택받은 사람,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 다른 발라드 작품 가사가 으레 그러듯 선택받은 주인공 입장에서 서사가 작성될 수도 있었지만, 노래는 가장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랑을 놓아줘야 했던 사람을 화자로 세웠다.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두겠소."
편지글 속 표현을 그대로 적은 것인지, 노랫말로 풀며 어느정도 다듬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이 인물이 악역이나 패자로 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도 품위와 절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를 높이고 고귀하게 비췄다. 김광진이 부르는 노래 여럿에서 드러나는 개성이자 어떤 품격이다.
◆곁이 아닌 존재를 바라보는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1991, 1집 'Virgin Flight' 및 1998, 2집 'My Love My Life')는 김광진 화자론의 초기 원형처럼 들린다. 제목만 보면 순정 가득한 사랑 노래 같지만, 김광진이 쓴 가사를 따라가면 이미 사랑은 흔들리고 있다.
일반적인 실연의 노래처럼 원망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떠난 상대의 존재 자체로 기쁨을 얻는다고 말한다.
"사랑이 떠나버려도 내겐 소중한 것을 가슴 깊이 느끼네.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내겐 기쁨을 주는데."
화자에게 사랑이란 성취가 아니라 상대의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쪽으로 물러나도 성립한다.
"내 진실을 주고 해맑은 사랑을 느꼈는데, 어느새 그대의 마음이 내게서 멀어져 갔나."
사랑 노래에서 흔히 얘기하는 '진심' '마음' '감정' 따위가 아닌 '진실'을 줬다고 얘기한다. 내 마음과 상대 마음의 등가 교환이 아니다. 사랑했다는 '거짓이 없는 사실'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했고, 이는 상대가 떠나도 그 존재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꽤 철학적으로 증명한다. '편지'가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의 언어라면, 이 곡은 사랑을 잃었다고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의 언어다.
◆웃고 있지만 비가 내리는
역시 김광진이 노랫말을 만든 '여우야'(1995, 더 클래식 2집 'The Classic 2')는 얼핏 밝고 경쾌한 러브송처럼 들린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이 노래를 풋풋한 연애담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다른 풍경이 보인다. 화자는 짝사랑 내지는 요즘 말로 '썸' 중이다. 동시에 어딘가 불안하다. 이별의 그림자 또한 드리워진듯 하다.
"너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긴 밤을 꼬박 새우고 빗속으로 어느 새 새벽이 오고 있어."
"이별을 느낄 때면 난 생각해 봐. 우리 사랑을 위한 시간인 걸. 너는 이런 내 맘을 아는지."
사랑과 이별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게 특징이다. 사랑 속에서도 이별의 기척을 발견하고, 이별 속에서도 사랑의 흔적을 발견한다. 행복과 불안, 설렘과 상실이 공존한다. 사랑을 유지하려 스스로 불안을 번역하는 사람의 마음을 쓴 건 아닐까. 이건 관찰력과 상상력과 표현력을 모두 갖춰야 할 수 있는 일이다.
〈下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