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카투사 95세 류영봉 참전용사 라팍 시구 나서…"나라 사랑하는 마음 잊지 말아야"

입력 2026-06-25 14:31:17 수정 2026-06-25 19: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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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나이에 인천상륙작전에 투입…전장 곳곳 누벼
"미군 없었으면 지금의 한국도 없었을 것"
"어렵게 지켜낸 나라, 지금의 청년들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줬으면"

6·25전쟁 76주년을 맞은 25일, 6·25참전유공자회 대구지부 남구지회에서 만난 류영봉 참전용사가 전쟁 당시 격전지를 표시해 직접 만든 지도 앞에서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경례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6·25전쟁 76주년을 맞은 25일, 6·25참전유공자회 대구지부 남구지회에서 만난 류영봉 참전용사가 전쟁 당시 격전지를 표시해 직접 만든 지도 앞에서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경례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지난 23일 6.25참전유공자회 대구지부 남구지회에서 만난 류영봉(95) 참전용사가 전쟁 당시 기억에 남는
지난 23일 6.25참전유공자회 대구지부 남구지회에서 만난 류영봉(95) 참전용사가 전쟁 당시 기억에 남는 '장진호 전투'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류 씨는 1950년 8월 16일 징집되면서 3주간의 훈련을 거친 뒤 의무병으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이후에도 휴전이 이뤄진 1953년 7월까지 최전선에 머물렀다.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장에서 그는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으며 살아남았다. 임재환 기자

"시구는 유명하고 직책이 높은 사람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저 같은 노인이 마운드에 선다고 하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6·25전쟁 참전용사이자 대한민국 최초 카투사 소속에 이름을 올린 류영봉(95) 씨가 오는 26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 시구에 나선다. 어린 시절 취미로 야구를 즐겼던 그는 일정이 잡힌 뒤로 '공 던지기' 연습에 한창이다.

이번 시구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류 씨가 던질 야구공은 교복 대신 군복을 입고 전장으로 향했던 한 소년의 삶을 돌아보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갑작스런 징집…한국 카투사 첫 기수

류 씨는 나라의 부름을 받았던 1950년 8월 16일 당시가 어제처럼 느껴진다. 대구 원대동에서 학교로 가던 길, 경찰로부터 '키가 크네' 한 마디에 군용트럭에 올라야만 했다. 목적지도,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가족에게 인사할 틈도 없이 18세 류 씨는 교복을 군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집결지에는 속옷 차림부터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당시 모인 인원은 약 2천명.

류 씨를 비롯한 청년들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합의에 따라 유엔군으로 편성됐다. 이후 이 조직은 카투사(KATUSA)로 정식 명칭이 바뀌었다. 그는 카투사 첫 기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군번은 'K1101755'. 전화번호보다 또렷하게 뇌리에 박힌 숫자다.

부산항을 거쳐 일본 요코하마와 후지산 인근 훈련소로 이동한 그는 3주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구호법과 응급처치, 부상자를 들것에 실어 후송하는 방법, 사격훈련 등 교육을 거쳤다.

훈련에 참여한 인원 대부분 무학자였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류 씨가 유일했다. 그는 어린 시절 큰형으로부터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되면 영어가 필요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사전을 들고 다니며 영어를 스스로 익혔다.

생활영어가 가능하면서 자연스럽게 미군 교관의 눈에 띄었다. 이후 교관의 지시사항을 동료들에게 전달하는 통역 역할까지 맡게 됐다.

1952년 류영봉(왼쪽) 씨가 전우와 전장에서 찍은 사진. 본인 제공
1952년 류영봉(왼쪽) 씨가 전우와 전장에서 찍은 사진. 본인 제공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까지

군사 훈련을 마친 그는 미군 7사단 의무대 위생병으로 배치되면서, 같은 해 9월 인천상륙작전에 곧장 투입됐다. 당시 장병들은 상륙작전이 군산에서 실시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군산상륙작전인 것처럼 정보를 흘린 것은 북한군을 속이기 위한 전략이었어요. 결국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서울 수복이 가능했는데, 맥아더 장군의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죠."

서울 수복 이후 북진한 부대는 압록강 인근까지 진격했다. 전쟁이 끝날 것만 같았으나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급변했다. 류 씨는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인 장진호 전투에 투입됐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벌어진 전투는 2주 넘게 이어졌다. 중공군은 해가 어두워질 때마다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고, 의무병이었던 그는 부상자를 후송하고 전사자를 수습했다.

특히 함께 근무하던 미군 위생병 우드 상병을 잃은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드 상병은 제가 많이 의지하던 친구였습니다. 환자를 후송하다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나는 살아남았는데 전우들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생각에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하던 흥남철수 역시 잊을 수 없다. 피란민과 같았던 북한 주민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유 씨가 속한 미 7사단은 대포와 군수물자 등을 배에서 내린 뒤 그 무게만큼 주민들을 태웠다.

류 씨는 한 달 넘게 이어진 가칠봉 전투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국군 5사단과 함께 힘을 합쳐 치열한 공방 끝에 승리한 전투였다.

"만약 그때 가칠봉을 점령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설악산은 우리나라 명산이 아니라 북한 땅에 있었을 겁니다. 나라를 지켜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이후에도 류 씨는 휴전이 이뤄진 1953년 7월까지 최전선에 머물렀다.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장에서 그는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으며 살아남았다.

1963년 대구 미군부대에서 근무 중 찍은 류영봉 씨의 모습. 본인 제공
1963년 대구 미군부대에서 근무 중 찍은 류영봉 씨의 모습. 본인 제공

◆ 45년간 캠프워커 근무…미군과의 인연

휴전 이후 미군 측은 류 씨에게 통역관으로 계속 근무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형제를 잃고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면서 1954년 7월 4일 군복을 벗었다.

제대 이후 민간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던 상황에서 미군부대로부터 다시 제안을 받았다. 영어를 구사하고 의무병 경험이 있다는 점이 높게 평가돼 1958년부터 대구 캠프워커 응급실에 취직했다.

"당시 미군은 현장 기술과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이후에 시험을 쳐서 관련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미군 덕분에 2004년까지 45년간 수간호원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퇴직 후에도 미군과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함께 싸운 미군들에 대한 고마움과 한미동맹의 의미를 잊지 않았던 그는 미군 적십자사 봉사활동에 뛰어들었다. 10여 년 동안 이어진 봉사시간은 5천974시간에 달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류 씨는 95세가 된 나이에도 학교를 찾아 '6·25 바로 알리기'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단순히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는 나라가 존재하기에 오늘의 자유와 일상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국가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나라가 있어야 나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바람은 우리 세대가 지켜낸 나라를, 지금의 청년들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줬으면 하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