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년,격동 80년]한국 경제 도약의 발판이 된 포항제철 신화 탄생

입력 2026-07-10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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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7월 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

1973년 7월 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식 단상 앞으로 흰 안전모를 쓴 건설 역군들이 열을 맞춰 도열해 있다. 하늘에는 포항제철 사기(社旗)가 힘차게 나부끼고 있다. 포스코 제공
1973년 7월 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식 단상 앞으로 흰 안전모를 쓴 건설 역군들이 열을 맞춰 도열해 있다. 하늘에는 포항제철 사기(社旗)가 힘차게 나부끼고 있다. 포스코 제공

1973년 6월 9일 포항 영일만. 한국 역사상 최초의 대형 고로(高爐)에서 쇳물이 터져 나왔다. 그 쇳물 한 줄기가 한국 중화학공업의 시대를 열었다. 1958년부터 다섯 차례 무산됐던 꿈이었다. 세계은행은 "불가능하다"고 했고, 국제 차관단은 등을 돌렸다. 선조들의 핏값으로 쌓아 올린 영일만의 용광로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이 됐다.

1973년 6월 9일 포항종합제철 1고로의 첫 출선(용광로에서 쇳물을 뽑아내는 일) 모습. 포스코 제공
1973년 6월 9일 포항종합제철 1고로의 첫 출선(용광로에서 쇳물을 뽑아내는 일) 모습. 포스코 제공

◆ 영일만의 기적

한 달 뒤인 7월 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식이 거행됐다. 박정희 대통령과 3부 요인, 내외 귀빈이 참석했다. 준공식이 열리는 날, 포항보다 오히려 서울이 더 떠들썩했다. 광화문 네거리에는 '慶祝 포항종합제철 준공'이라고 쓴 초대형 아치가 세워졌다.

서울에서 포항까지 특별열차가 운행됐다. 포항종합제철소 전경과 최초의 대형 고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오는 순간을 담은 10원권 기념우표도 발행됐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1973년 포항종합제철 공장준공기념 10원권 우표 시트. 고로(高爐)에서 오렌지빛 쇳물이 쏟아지는 장면을 담은 컬러 도안으로 대한민국 우표(Republic of Korea) 표기와 함께
1973년 포항종합제철 공장준공기념 10원권 우표 시트. 고로(高爐)에서 오렌지빛 쇳물이 쏟아지는 장면을 담은 컬러 도안으로 대한민국 우표(Republic of Korea) 표기와 함께 '포항종합제철 공장준공기념 1973'이 인쇄됐다. 포스코 제공

포항제철 건설 구상은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피츠버그 철강공업 지대 시찰에서 비롯됐다. 거대한 용광로와 끝없이 이어지는 생산 라인 앞에서 그는 확신했다. 철강 없이는 중화학공업도 없다는 판단이었다.

건설의 중책은 박태준에게 맡겨졌다. 만성 적자와 부패에 시달리던 대한중석을 부임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돌려놓은 인물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를 낙점한 이유였다.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됐다.

1973년 7월 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이 고로에 화입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1973년 7월 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사장이 고로에 화입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 "실패하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박태준의 제철보국(製鐵報國)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세계은행(IBRD)은 "채산성이 없다"며 자금 지원을 거절했다. 차관을 약속했던 국제제철차관단(KISA)도 등을 돌렸다. 후진국이 제철업에 뛰어드는 것 자체를 세계가 비웃었다. 박태준은 벼랑 끝에 섰다.

낙담한 채 귀국길에 오른 박태준은 하와이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로 확보한 대일청구권(對日請求權) 자금을 포항제철 건설에 전용하자는 것이었다. 원래 농수산 지원 용도로 책정된 자금이었다.

국내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밀어붙였다. 박태준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계와 철강업계 지도자들을 찾아가 설득했다. 끈질긴 로비 끝에 일본 제철업계의 기술 지원까지 확보했다.

1973년 7월 4일자 매일신문 1면. 전날인 3일 포항 영일만에서 거행된 포항종합제철 준공식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매일신문DB
1973년 7월 4일자 매일신문 1면. 전날인 3일 포항 영일만에서 거행된 포항종합제철 준공식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매일신문DB

1970년 4월 1일, 착공이 시작됐다. 대일청구권 자금과 일본 상업은행 차관을 합쳐 총 1억 2,370만 달러를 조달했다. 공사비만 1,200억 원.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3배였다.

39개월간 연인원 315만 명이 동원된 단군이래 단일사업으로 가장 큰 규모의 공사였다. 250만 평의 습지를 항만 준설로 퍼 올린 모래로 메웠다. 해일과 싸워가며 10개 공장, 12개의 부대시설이 세워졌다. 전쟁이었다.

박태준은 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선조들의 핏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만큼,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 하여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 고 말했다. 잘 알려진 포스코의 '우향우 정신'이다. 현장의 직원과 건설 요원들은 밤낮없이 돌관공사를 강행했다. 예정 공기를 한 달이나 단축했다.

1973년 7월 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식 기념 책자. 왼쪽 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致辭)가, 오른쪽 면에는 박태준 사장의 경과 보고가 나란히 수록됐다. 안전모를 쓴 박태준 사장의 현장 사진도 함께 실려 있다. 포스코 제공
1973년 7월 3일 포항종합제철 준공식 기념 책자. 왼쪽 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致辭)가, 오른쪽 면에는 박태준 사장의 경과 보고가 나란히 수록됐다. 안전모를 쓴 박태준 사장의 현장 사진도 함께 실려 있다. 포스코 제공

◆ 세계가 비웃던 나라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준공 첫해, 포항제철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가동 첫해부터 242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투입된 외자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규모였다. 세계 최초로 제철소 가동 첫해에 흑자를 낸 사례였다.

"한국이 철강 산업을 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비웃던 세계은행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비결은 세 가지였다. 건설요원들이 공기를 단축해 건설비를 낮췄다. 설비와 원료를 최저 가격에 구매했다. 해외 연수로 훈련된 자체 기술진이 1기 설비를 직접 가동했다. 무엇보다 모든 포스코인이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사명감으로 뭉쳤다. 그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

1973년 6월9일자 매일신문 1면에 실린 포항종합제철 고로 화입식 관련 기사. 매일신문DB
1973년 6월9일자 매일신문 1면에 실린 포항종합제철 고로 화입식 관련 기사. 매일신문DB

포항 1기 설비 준공은 한국 산업사의 분수령이었다. 조강 연산 103만 톤으로 시작한 쇳물은 반세기 만에 3,500만 톤으로 불어났다. 한국의 산업 구조가 바뀌었다. 경공업 중심의 나라가 중화학공업 강국으로 탈바꿈했다. '산업의 쌀'인 철강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자 조선·자동차·건설·기계 등 주력 산업이 일제히 도약했다.

한강의 기적은 영일만의 용광로에서 시작됐다. 포스코는 창사 이래 단 한 차례의 적자도 없이 흑자 전통을 이어갔다. 세계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철강 강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