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동아시아 국제대전의 발발인 고수전쟁 - 70년 전쟁을 보는 새로운 시각

입력 2026-06-22 14: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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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나라는 안시성 패배 이후에도 고구려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왜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았으며, 그 결과 동아시아의 질서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중국을 통일한 강력한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을지문덕이라는 영웅의 활약으로 살수대첩에서 승리했고 침략을 막아냈다. 이후 당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양만춘이 지휘하는 안시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고 당군은 철수했다. 한편 신라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멸망시켰고, 남북에서 협공을 받은 고구려는 끝내 멸망했다. 그 결과 삼국은 통일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배운 역사이며, 오랫동안 역사학계가 설명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전쟁의 성격과 구조, 그리고 동아시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왜 수나라는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면서까지 고구려를 거듭 공격했는가? 왜 당나라는 안시성 패배 이후에도 고구려를 포기하지 않았는가? 왜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았으며, 그 결과 동아시아의 질서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기존 해석의 한계와 새로운 연구 틀
기존의 설명은 이러한 질문들에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실 자체보다 사실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동아시아와 우리 역사의 운영 메카니즘을 오해했으며, 중화사관의 편향성이 강했다. 때문에 고구려는 일방적인 침략을 받은 나라로 규정됐고, 국력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수행했던 주체적인 역할 등은 주목받지 못했다. 둘째, 영웅 중심의 역사관 때문에 을지문덕과 양만춘,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역할을 많이 부각시켰다. 때문에 일반 주체들의 역할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셋째, 국제대전을 고구려와 수나라, 신라와 백제라는 양국 관계의 차원으로 축소했다. 따라서 동맹, 균열, 재결합 등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동아시아의 상황을 충분하게 검토하지 못했다. 넷째, 대전쟁을 외교와 경제, 산업과 물류를 포함한 총력전의 관점보다는 정치적·군사적 충돌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국제 전쟁의 원인과 전개, 결과 등의 복합성을 설명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몇 가지 방식으로 이 전쟁들을 분석하고 규정했다. 우선 전쟁이 발생한 목적과 배경과 원인 등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파악했다. 영토 분쟁이나 지배자의 성격과 가치관, 집단의 정서 등 내부 사정을 넘어 국제질서의 재편, 무역권의 확보, 외교망의 구축과 같은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이해관계로 파악한다. 전쟁하는 주체의 다양성과 역할 등을 동아시아 전체라는 '틀(frame)'에서 복합적으로 파악한다. 직접 당사국들은 물론이고, 백제, 신라, 돌궐, 거란, 말갈, 왜 등의 주변세력, 이어 서역(신장 지역), 토번(티베트) 및 중국 외곽의 민족 세력 등의 역할과 위상을 파악하고, 나아가 유라시아 세계의 움직임도 함께 고려한다.

공간에 대한 시각 역시 변화가 필요하다. 고구려와 수·당 사이의 대결, 이후에 전개된 신라와 백제·왜 연합군의 대결 등은 육상전 만이 아니었다. 외교와 군사, 물류와 산업의 측면에서 바다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실제로 『수서』와 『당서』, 『자치통감』 등에 나타난 기록들은 대규모 함대의 건조와 운용, 해상수송과 해양작전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전쟁은 '해륙양면전'으로 분석한다.

또 하나 시간의 문제가 있다. 1단계 고수전쟁, 2단계 고당전쟁, 그리고 삼국통일전쟁을 각각 독립된 개별전쟁으로 보지 않는다. 장기적인 틀에서 전쟁의 목적과 배경, 참가국들, 과정과 전쟁의 결과 등을 고려하면 고수전쟁은 발발, 고당전쟁은 전개 과정, 삼국통일전쟁은 동아시아 신질서가 완성되는 대단원이었다. 598년부터 668년까지 70여 년에 걸쳐 전개된 유기적인 역사적 과정이었다. 이러한 해석틀에서 나는 30여 년전부터 '동아시아 국제대전'이라고 규정하였다.(윤명철, 『고구려 해양사연구』)

이제 첫 단계인 동아시아 국제대전의 서막이 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살펴본다.

◆東아시아의 중핵국가인 고구려
고구려는 5세기 이래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핵으로서 중국의 남북조·북방초원의 유연(후에는 돌궐)과 4각축을 이루고, 주변에 백제·신라·거란 그리고 왜 및 말갈 등을 놓고 다원적인 세력 균형을 유지해 왔다. 경제적으로는 랴오둥(遼東) 지방을 가운데 두고 만주의 동부 지역과 대·소 흥안령산맥의 북부 지역, 화북평원으로 이어지는 요서(遼西) 지역 등을 이어 주면서 북방무역망을 형성했다. 또한 일본 열도·제주도·양쯔강 유역의 남조정권들과 해양무역망을 운영했다. 이러한 해륙적 시스템 속에서 중계무역을 활용했다. 잘 알려진 안시성, 요동성 지역은 동아시아에서 최대의 철생산지였다. 고구려는 우수한 철들을 흥안령 지역의 선비족인 남실위에 수출했다. 그 대신 말과 담비가죽 같은 북방의 특산품들을 수입했다. 당시 중국 지역은 남북국가로 분단돼 무역망이 끊어진 상태였으므로 북방에서 수입한 물건들을 배에 실어 수도권인 상해 주변지역으로 수출하였다. 고구려는 중계무역으로 엄청난 이익을 챙겼고, 이것을 군시력 증대에 활용했을 것이다.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치질서와 두 강대국의 충돌
그런데 6세기 말이 되면서 분단됐던 중국 지역이 400년 만에 선비족의 수나라로 통일되었다. 수나라는 동아시아 세계의 종주권을 회복하고, 불필요해진 군사력과 내부에서 들끓고 있는 정치적인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시켜야 했다. 한편, 북방 초원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뛰어난 돌궐 제국이 수나라를 수세에 몰아넣고, 고구려의 영향권에 속했던 요서의 거란과 동북만주의 말갈이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압박을 200년 동안 받아온 백제와 신라는 수나라와 신속하게 교섭을 시도했고, 공동 전선의 구축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수나라를 도와주지는 않았다. 왜국은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고구려는 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 승려들을 보내 내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사가 건축될 때 영양왕은 수나라와 전쟁이 임박했음에도 황금 300냥을 보냈다.

일본 최초 사찰인 아스카사. 완공 때 영양왕이 금 300냥 기증, 초대 주지에 고구려 혜자 승려. 윤명철
일본 최초 사찰인 아스카사. 완공 때 영양왕이 금 300냥 기증, 초대 주지에 고구려 혜자 승려. 윤명철

이 상황에서 고구려가 북방초원의 유목민인 돌궐과 동맹을 맺고, 내부에 있는 말갈, 거란 등을 동원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면 수나라를 위협할 수 있다. 실제로 수군으로 발해를 건너 요서지방과 화북의 해안과 산동의 해안에 상륙한 다음, 즉 수륙양면작전으로 하북 지역을 일시에 공격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국제 질서 속에서 동서 두 강대국의 충돌은 불가피했으며, 주변국가들은 자국의 운명과 연결될 수 있는 상황 파악에 주력했다.

결국 598년 2월, 고구려와 말갈(혹은 거란)의 혼성군이 요하를 넘어 수나라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했다. 수군은 요동반도의 비사성을 출항하여 발해 안쪽의 요서해안을 공격했다. 그러자 준비했던 수나라의 문제는 곧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그런데 산동 해안을 출항한 수군 6000명은 대풍을 만나 표몰했다. 이 궤멸은 자연환경보다는 고구려가 요동반도의 해안선과 섬들에 구축해놓은 해양방어체제와 수군의 공격때문이다.(윤명철, 『고구려 해양방어체제(해성)연구』)고구려가 승리한 것이다.

사진 자료. 4 5 6

요동반도 해안선의 방어체제인 오고성. 석하사진문화연구소
요동반도 해안선의 방어체제인 오고성. 석하사진문화연구소
요동반도 섬방어체제의 하나인 장산군도의 고려성(이 해역에 6개의 고구려 성이 발견됐다). 윤명철
요동반도 섬방어체제의 하나인 장산군도의 고려성(이 해역에 6개의 고구려 성이 발견됐다). 윤명철

수나라의 2대 황제가 된 양제는 북경시 외곽에서 절강성의 항주에 이르는 대운하 공사에 들어갔다. 정치적으로 통일하고, 물류 체계를 활성화시켜 유기적인 경제권을 만드는 정책이었다. 더불어 고구려와 대결전에 필요한 남방의 군량미와 인력들을 운송하기 위해서다. 그는 수륙양면작전을 대비해 적함, 루선(다락배) 등 수만 척의 배들을 건조했는데, 주력 전선인 '오아(五牙)'는 다락이 5층이고, 군사 800인을 태울 수 있는 거대 전함이었다.

◆세계 전사상 유례없는 승리, 살수대첩
612년, 1,133,800명이라는 수나라의 대군대가 베이징(北京) 근처의 대운하 종점인 탁군을 출발했다. 세계의 전사상에서 가장 큰 단일 전쟁으로 총 24군 편제이며, 그 중 11개 군이 수로군 편제였다. 길이가 수 백 리에 뻗칠 정도의 많은 함대들이 동원된 수군의 작전 범위는 압록강 하구와 대동강 하구, 경기만까지였다. 육군인 친정군은 요하 도하작전을 성공시킨 후에 부수도격인 요동성(오열홀. 요양시)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대군과 당거(바퀴 달린 이동용 수레)·충거(성벽을 공격하는 기구)· 높은 사닥다리 등 신무기들을 동원했고, 심지어는 땅굴(地道)까지 팠다. 하지만 수양제는 끝내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퇴각했다.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의무려산. 요하 서쪽에 있다. 전쟁 초기 고구려 전진초소는 요서에 있었다.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의무려산. 요하 서쪽에 있다. 전쟁 초기 고구려 전진초소는 요서에 있었다. 석하사진 문화연구소
요동성이 그려진 요동성총(평남, 순천시).
요동성이 그려진 요동성총(평남, 순천시).

한편 수양제의 작전 지시로 30만 명의 별동대는 요하전선을 북으로 우회하여 고구려의 내부 깊숙이 전진했다. 별동대는 을지문덕군에게 유인당해 승리(?)를 거듭하면서 평양성 근처까지 갔다. 한편 래호아가 지휘한 수군 함대는 산둥 해안을 출발하여 서해를 횡단한 후에 대동강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고 평양성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평양성 60리 밖에서 영류왕이 된 고건무 장군의 공격을 받고 궤멸당했다. 이렇게 해서 수륙협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별동대는 황급하게 퇴각했고, 결국 살수(압록강 또는 청천강)에서 을지문던 군에게 전멸 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요하를 건너서 돌아간 수나라군은 2,7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수양제는 613년과 614년에도 요하전선을 공격했지만 전과는 없었고, 결국 건국한 지 30년 만인 618년에 멸망했다. 중국의 학자들은 수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내부 반란 탓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무리한 전쟁 준비에 따른 경제적 파탄과 전쟁의 패배가 큰 원인이다. 고구려의 대승리는 동아시아 세계는 물론이고, 유라시아 세계 곳곳에 알려졌을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고구려가 수나라가 멸망한 직후인 618년 8월에 왜국에 사신과 함께 수나라 포로 2명과 악기·무기·낙타 등의 노획물을 보낸 사실이 기록됐다. 왜에게 승전 소식을 전하고 영향력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사진 자료, 1

사본 - 고수전쟁도
사본 - 고수전쟁도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방어한 고수 전쟁

이 전쟁은 동아시아 세계의 모든 종족들과 크고 작은 국가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했고, 심지어는 돌궐, 실크로드 지역의 소국가 등 유라시아 세계와도 연동된 국제대전이었다. 또한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무역권을 둘러싸고 운명을 걸고 대결한 양대 질서의 전면적인 대결이었고, 서로 다른 문명의 충돌장이었다. 가정을 해본다. "만약 고구려가 졌다면 우리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필시 고당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 후의 결과와 동아시아 세계의 메카니즘을 고려하면 백제와 신라는 승전국인 수나라 질서에 편입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되면 우리 민족의 생존권은 상실되었을 수도 있다.

고수전쟁은 동아시아는 질서가 정치 재편되는 상황 속에서 국제대전의 성격을 띄울 수밖에 없었으며, 육지뿐 만 아니라 해양질서가 정치나 외교에서 얼마나 중요했으며, 본격적인 해양전의 시대에 돌입했음을 깨닫게 했다. 이러한 역학관계와 양상들은 멸망해버린 수나라를 이어받은 당나라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