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누가 돈 괄시를 한다니?

입력 2026-06-11 09: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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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설득
제인 오스틴 지음/ 문학동네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2017년 영국중앙은행은 십 파운드 지폐의 새 디자인을 공개한다. 언니 커샌드라가 스케치한 제인 오스틴의 초상. 그러나 배경이 소설을 쓰던 스티븐턴 목사관도 초턴 하우스도 아닌 오빠 에드워드의 고드머셤 파크였다는 사실에 제인 오스틴의 열혈 팬은 아연실색했다. 어쨌거나 평생 자본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소설의 태반을 돈의 사회학으로 채색한 작가가 지폐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제인 오스틴 소설의 척추인 '결혼'은 곧 당시 영국 여성의 생존권과 직결되었다. 영국은 '한정상속법'에 따라 모든 재산을 장자가 물려받게 된다. 귀족과 젠트리 계급은 딸과 미망인을 위해 지참금과 사전 상속을 마련하지만, 재산이 넉넉하지 않거나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 대책이 없었다. 그나마 차남이나 남자 형제는 교육받을 기회를 얻어 군인이나 목사로 생계를 잇지만, 딸과 미망인은 장남의 온정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얘기. 제인 오스틴 소설에 빠짐없이 군인과 교구 목사가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인 오스틴도 최고의 후원자인 아버지 조지 오스틴의 사망으로 생활이 힘들어지자 사우스햄턴까지 떠돌게 된다. 1808년 부잣집에 입양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오빠 에드워드가 초턴 코티지 한 채를 내어줌으로써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몰두하기 전까지.

제인 오스틴의 유작이자 마지막 완성작인 『설득』은 그의 작품을 통틀어 시대 배경을 밝힌 유일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되어 참전했던 군인이 돌아오는 1814년 여름에 시작한다. 가진 것 없고 장래가 불투명한 해군 웬트워스와의 약혼을 파기한 앤. 친구의 가족 특히 대녀 앤을 보호할 마음으로 파혼을 설득한 레이디 러셀과 큰 재산을 모아 돌아온 해군 대령 웬트워스가 중심인물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설득이란 '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하는 것'이다. 책에는 몇 차례의 설득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중 레이디 러셀은 흥미로운 존재이다. 지혜롭고 신뢰할 수 있으며 앤을 아끼는 책임감 충만한 인물인 동시에, 타인 삶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은 욕망이 과한 사람처럼 보인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설득일지라도 타인의 인생에 대한 부당한 간섭일 수 있다. 그런데도 레이디 러셀의 충고가 악의 없다는 걸 알기에 과거사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려는 앤의 말. "설사 한때 남의 설득을 따랐던 것이 잘못이었다 해도 모험이 아니라 안전을 권하는 설득을 따랐다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전 그분 뜻을 따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어요."(324쪽) 성숙한 여인의 자긍심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번역가 김선형은 『설득』에 대해 '말하지 못한 마음이 봇물 터지듯 나오는 이야기, 침묵하던 생각이 드디어 목소리가 생기는 이야기'라고 논평하면서, 첫 소설 『이성과 감성』의 엘리너와 『설득』의 앤을 짝으로 놓는다. 또한 "당신이 내 영혼을 관통했다."는 웬트워스의 고백을 통해 두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내 어머니는 종종 "누가 돈 괄시를 한다니?"라고 하셨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전쟁을 겪고 배고픔과 노동의 고단함을 이고 지고 살아온 세대에게 사무친 것. 돈의 힘이었다. 8년 만에 돌아온 웬트워스 대령이 이만 오천 파운드를 가진 부자가 아니었다면 아무리 지혜롭고 속 깊은 앤일지라도 다시 그와 연정에 빠질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속물인 탓인지 몰라도, 진심으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