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 펼친 히라가나 노트…'배움'이 위기 청소년을 다시 살렸다

입력 2026-05-24 20:25:04 수정 2026-05-24 20: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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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선택 시도했던 10대 소녀들, 병상서 '마지막 대피소' 찾아
원목수녀가 건넨 빈 공책에 히라가나 적으며 삶의 의지 복원
"지식 습득 넘어 정체성 유지… '병원 속 교실' 제도화 시급"

위기 청소년 김하은(가명·14) 양이 장기 입원 중인 병실에서 스스로 일본어 글자를 쓰며 공부한 노트. 전문가들은 병원 내 배움이 아이들에게 단순한 학업 이어가기를 넘어 사회적 정체성을 지켜주는 강력한
위기 청소년 김하은(가명·14) 양이 장기 입원 중인 병실에서 스스로 일본어 글자를 쓰며 공부한 노트. 전문가들은 병원 내 배움이 아이들에게 단순한 학업 이어가기를 넘어 사회적 정체성을 지켜주는 강력한 '심리적 치료' 역할을 한다고 입을 모은다. 미래로병원 제공
미래로병원 입원 중 이춘자 원목 수녀(오른쪽)가 건넨 보라색 꽃(벌개미취)을 든 채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그리며 미소 짓고 있는 김하은(가명·왼쪽) 양. 극단적 선택의 기로에 섰던 하은 양은 안전한 병원 안에서 배움과 따뜻한 정서적 지지를 받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미래로병원 제공
미래로병원 입원 중 이춘자 원목 수녀(오른쪽)가 건넨 보라색 꽃(벌개미취)을 든 채 손가락으로 브이(V) 자를 그리며 미소 짓고 있는 김하은(가명·왼쪽) 양. 극단적 선택의 기로에 섰던 하은 양은 안전한 병원 안에서 배움과 따뜻한 정서적 지지를 받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미래로병원 제공

"죽고 싶어서 몸을 내던졌지만, 차가운 물속에 들어간 순간 격하게 살고 싶어 져서 물을 잔뜩 먹으며 살려달라 외쳤다."

열아홉 살 신지민(가명) 양이 병상에서 쓴 수기 '금오산 호수에 뛰어든 나'의 한 구절이다. 부모의 이혼 후 조부모 밑에서 자란 지민 양은 아빠에게마저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금오산 저수지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극적으로 구조돼 정신건강의학과 병동에 입원한 그에게, 병원은 차가운 세상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켜준 유일한 '대피소'였다.

또 다른 입원생 김하은(가명·14세) 양의 상처도 깊었다. 극심한 학업 스트레스와 "죽을 테면 죽든지"라는 아빠의 모진 폭언은 중학교 2학년 소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결국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위험한 선택을 시도했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하은 양은 초기 병원 상담에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없애버리고 싶다"며 극심한 자기혐오와 짓뭉개진 자존감을 드러냈다.

벼랑 끝에 서 있던 하은 양에게 기적 같은 변화가 찾아온 것은 병실 한구석에서였다. 병원 원목 수녀가 마음을 적어보라며 건넨 빈 공책에 하은 양은 일본어 히라가나를 꾹꾹 눌러 적으며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다. 수녀님에게 일본어 공부를 한다고 야단맞을까 봐 무서워 몰래 숨어서 했다는 아이에게, 수녀는 "일본어든 영어든 네 마음대로 적어도 된다"며 따뜻한 격려를 건넸다.

늘 성적 압박 속에서 혼나기만 하던 아이는, 안전한 병원에서의 작은 배움과 지지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했다. 식사를 거부하며 단식까지 하던 하은 양은 웃음을 되찾았고, 퇴원 전 "나처럼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빛나는 꿈을 품고 씩씩하게 병원 문을 나섰다.

이처럼 극단적 위기에 처한 청소년들에게 병원 내 학습과 배움은 단순한 학업적 의미를 넘어선다는 게 현장의 전언이다.

도내의 한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위기 청소년들에게 병원 내 '학습'은 단순히 학업 진도를 맞추는 지식 습득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사회에서 버림받지 않은 '학생'이라는 최소한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과정"이라며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재활 치료가 곧 배움"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공교육 행정이 이 아픈 아이들에게 '결석 누적으로 인한 유급'이라는 징벌적 결과를 안겨줘서는 안 된다"며 "세상과 다시 이어질 수 있는 마지막 연결 고리인 '병원 속 교실'을 제도적으로 시급히 보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