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라는 민주적 절차 통한 새 출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서 대통령으로
헌법 6조 전문에 "5·16 혁명 이념 넣어"
1962년 12월 17일에 치러진 첫 국민 투표는 제3공화국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민주적 절차였다. 5·16 군사정변(쿠데타)으로 정권을 탈취했다는 오명을 벗고, 민주공화국으로 산뜻한 새 출발을 위한 국민적 동의 절차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투표율 85.3%, 찬성율 78.8%로 10명 중 8명은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미인 셈이다. 제3공화국 내내 박 대통령은 국민적 협조 속에 경제 성장이라는 꽃을 한껏 피웠다.
이런 국민적 동의 절차를 구했기에 제3공화국의 탄생과 이 나라의 새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은 떳떳하게 대한민국의 새 출발을 알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제3공화국은 10년 동안 건재했다. 제6대 국회가 개원한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2년 12월 26일까지 지속된 대통령 중심제 정부였다. 이 기간 동안 박 대통령은 제5~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1972년부터는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 체제로 접어들었으며, 독재의 길로 가는 초석을 깔았다.
◆'박 의장'에서 '박 대통령'으로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군부 또는 군정은 본질적으로 '쿠데타 세력'이라는 오명을 벗기는 힘들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쓰지 못했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는 직책을 부여했다. 박 의장으로 있는 동안 새 나라의 새 헌법을 만들었다. 1963년 12월 17일 마침내 제3공화국의 선포와 함께 대통령에 당당하게 취임했다.
사실 박 의장은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 젊고 과단성 있는 이미지로 윤보선 후보를 0.97% 차이(15만 표)로 이겼다. 영남 지역의 압도적으로 지지가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12월 12일 최두선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김유택 부총리, 정일권 외무부장관 등 제3공화국의 초대 내각을 구성한 후 17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당은 총선에서도 크게 승리해 전체 의석의 62%를 차지했다.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취임한 박 대통령은 1964년부터 국가 발전을 위한 계획에 과감하게 착수했으며, 수출 진흥을 국정의 제1목표로 삼았다. 이는 '한강의 기적'의 기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제3공화국 내내 국가 중심의 산업화 정책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었다. 이에 다수의 국민들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로 화답했다.
◆4·19 의거와 5·16 혁명 이념에 입각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 의거와 5·16 혁명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대한민국 헌법 제6호)
박 대통령은 국민투표에 부친 헌법 개정을 통해 제헌 헌법부터 전문에 수록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독립정신)를 계승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내용을 삭제하고,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렇듯 헌법 전문을 개정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 나라의 발전과 국민의 복지를 위해 탄생했음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도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한 핏줄기 이 민족의 가슴 속에 붉은 피 용솟음치는 분발의 고동과 약진의 맥박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나는 국민 앞에 군림하여, 지배하려 함이 아니요. 겨레의 충복으로 봉사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새 시대의 청사진도 제시했다.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의 아침이 밝았다"며 "침체와 우울, 혼돈과 방황에서 우리 모든 국민은 결연히 벗어나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으로 재기합시다.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세로써 희망에 찬 우리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자"고 역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