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오의 대구경북의 집이야기] 매화처럼 피는 마을, 칠곡 매원마을

입력 2026-03-27 13: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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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곡종택의 종부는 사당 앞에 서서 종택의 내력을 차분히 들려준다.
박곡종택의 종부는 사당 앞에 서서 종택의 내력을 차분히 들려준다.

◆후손들의 애씀이 살린 마을

마을 초입에 소나무 제단, 송단이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유래는 가볍지 않다. 1623년, 이곳의 입향조 석담 이윤우(石潭 李潤雨, 1569~1634)가 마을 초입 언덕에 감호당(鑑湖堂)을 지을 무렵부터 소나무가 자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송단은 마을과 함께 동고동락한 유산이라 할 만하다.

이 나라 마을들은 터의 기운을 보완하는 비보림을 두었다. 마을 서쪽의 기운이 허하다 하여 선조들이 비보림을 일궜는데, 그곳으로부터 이어지는 지맥이 끝나는 자리에 송단이 있다. 매원마을에 들게 된다면, 발걸음을 이곳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단과 가깝게 감호당이 있다. 지금은 내려다볼 호수가 없지만, '감호'라는 이름에는 자연 풍광을 즐기며 살고자 한 입향조의 뜻이 담겨 있다. 한편, 감호당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닦는 강학소로 쓰였으니, 그 내력이 깊다.

감호당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광주 이씨(廣州 李氏)의 집성촌 한옥들이 서로 어깨를 겯고 맞닿아 있다. 칠곡 매원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영남을 대표하는 3대 반촌 중에서 하나로 꼽힌다. 2023년에는 마을 단위로는 전국 최초로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형적인 옛 터이다. 용두산과 죽곡산 등이 꽃잎처럼 둘러싼 곳, 그 앞으로 동정천이 흐르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터에 마을이 들어섰다.

그 이유 때문일까. 마을은 예로부터 이조판서와 대사헌 등 뛰어난 인물을 여럿 배출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깊은 상흔이 남아 있다. 전성기에는 400여 채의 가옥이 있었으나 6·25 전쟁을 거치며 많은 고택이 소실되었고, 지금은 60여 채만이 남아 있다. 매원마을이 오늘까지 존속하게 된 까닭은 단지 터의 기운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 터를 가꾼 후손들의 애씀 덕분에 마을은 비로소 일어설 수 있었다.

박곡종택의 원형은 달라졌으나, 이 집을 가꾸는 후손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박곡종택의 원형은 달라졌으나, 이 집을 가꾸는 후손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기품이 흐르는 집, 박곡종택

감호당을 지나 마을 안으로 더 깊숙이 발을 들인다. 가장 먼저 마주한 곳은 박곡종택(朴谷宗宅)이다. 조선 숙종 조에 예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박곡 이원록(朴谷 李元錄, 1629~1688)의 종가로, 본래는 86칸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집이다. 하지만 나그네를 반기는 종택은 예전처럼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당당하던 가옥의 태반이 전쟁의 포화 속에 스러져 버린 탓이다.

6·25전쟁은 매원마을을 비껴가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이 지척이었던 이곳에 북한군 사령부가 들어섰고, 인근 지경당은 야전병원으로 쓰였다. 이를 저지하려는 유엔군 폭격은 자심했으니, 목조 가옥들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어디 박곡종택뿐이랴. 이 땅의 고된 역사를 겪으며 사람만 다친 게 아니다. 대를 이어 기대어 살던 집들도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렇기에 선조의 터전을 버리지 않고 어렵사리 지켜낸 후손들의 마음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무너진 지붕 기와를 하나하나 주워 모아 돌과 흙으로 버무려 올린 종택 토석담이 그 증거다. 집을 일으키겠다는 후손들의 의지가 담장으로 남았다.

조심스레 너른 집안을 살피던 중, 종부 이명숙(85세) 여사를 뵙게 되었다. 퇴계 가문에서 시집온 그녀는 낯선 나그네의 방문에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앞장서서 곳곳을 안내한다. 조곤조곤 들려주시는 말씀에서 집안 내력이 겹겹이 풀려나온다. 말씀에 이끌려 종택의 흔적을 눈에 담다가 이른 곳은 사당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사당만큼은 불길을 피했다. 전란의 한복판에서 선조를 모신 사당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복원된 안채에는 후손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다. 안채는 중앙에 4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랑이 붙은 'ㄷ' 자형 건물이다. 겹처마로 된 지붕이 돋보이는 안채다. 고택의 원형을 지키는 일이 왜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깃든 후손들의 삶이 아닐까. 선조의 터를 이어받되, 후손의 삶을 품는 집, 그런 집이 더욱 찬연한 법이다.

종부에 이어 15대 종손 이상곤 선생이 집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이승해는 종택 복원보다 대의를 먼저 말하던 분이다. "우리가 신문물을 몰라 나라를 뺏겼으니, 배워야 한다."며 매원초등학교 설립을 이끌었다. 1949년 9월 1일, 사송헌(四松軒)에서 학교 개교식이 열린다. 전쟁의 상처를 몸에 새긴 채 사셨던 할아버지가 인재를 배출한 장원방의 명성을 되살린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옆으로 낮은 담장이 펼쳐지고, 그 곁에 선 회화나무 한 그루가 종택의 기품을 굳건히 붙들고 있다. 계단 아래 오래된 우물은 고택의 자화상처럼 봉긋 솟아 있다. 아, 이 집은 과거에 갇힌 게 아니었다. 지금도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집임을 깨달으며 나그네는 길을 나선다.

지경당의 담장과 대문채가 한 폭의 그림처럼 나그네의 시선을 붙든다.
지경당의 담장과 대문채가 한 폭의 그림처럼 나그네의 시선을 붙든다.

◆공경이 솟는 집, 지경당

매원 길을 더 걸어, '멈추어 존경한다'는 지경당(止敬堂) 대문채 앞에 선다. 6월이면 담장을 붉게 물들이는 찔레꽃으로 이름난 곳이다. 기품이 있는 대문채가 시선을 붙든다. 낮게 이어지던 황토색 담장은 대문에 이르러 한껏 솟구친다. 그 위에 팔작지붕 대문채가 의연하게 얹혀 있다.

지경당은 한 번에 지어진 집이 아니다. 이 집은 종가에서 갈라져 마련된 가옥이다. 19세기 후반, 이이종(李以鐘, 1831~1878)이 둘째 아들 이지연(李志淵, 1858~1931)을 분가시키기 위해 지은 집이 지경당이다. 다른 집의 안채를 옮겨와 중심으로 삼았고, 이후 사랑채, 대문채 등을 차례로 덧붙여 지었다. 이 집은 다른 곳에서 옮겨와 다시 세우고, 그 뒤 칸을 늘려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열린 대문으로 들어선다. 흙으로 다져진 마당이 군더더기 없이 펼쳐진다. 그 위를 가로지르는 둥근 디딤돌들이 나그네를 안채로 조용히 이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사랑채에서 나와 '뉘시오' 하며 물을 듯하다. 크기와 생김새가 제각각인 돌들이 뒤섞인 파격적인 담장을 눈에 담으며 중문간채를 거쳐 안채로 들어선다. 대문채, 사랑 마당, 중문간채, 안채 마당으로 연결된 지경당의 공간 구성이 자연스러운 동선을 이룬다.

안채 마당에 들어서니 지경당의 후손 이수욱 선생이 맞아준다. 새로 손본 기둥과 오래된 목재가 조화를 이루는 안채는 후손의 손길로 가꾸어지고 있다. 마당 한편에는 크기가 다른 옹기들이 오밀조밀 모여 장독대 풍경을 빚어낸다. 후손의 안내를 받아 사랑채로 들어서는 순간,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넉넉한 공간에 놀라게 된다. 내부는 마치 골짜기처럼 품을 넓게 열어, 사람을 끌어들인다.

다시 안채 마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후손은 이곳을 무대로 삼아 집의 바탕을 풀어낸다. "문화 관광이란 단순히 경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넓은 집에서 어떻게 부대끼며 살았는지 그 '모습'을 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과거를 통해 미래의 좌표를 읽는 진정한 문화의 체험입니다."

매원마을 동솔밭 지맥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한 송단에서 발걸음이 시작된다.
매원마을 동솔밭 지맥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한 송단에서 발걸음이 시작된다.

매원마을의 고택들은 박제된 빈집이 아니다. 고택과 고택 사이사이로 들어앉은 신식 건물들이 역사 마을의 풍경을 흐린다는 시선도 있다. 그 말처럼 예전의 원형이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마을을 지탱하게 한 힘은 건물의 형상이 아니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후손들의 삶이 마을을 일군 힘이다. 후손들은 박곡종택, 지경당, 해은고택만이 아니라 상매, 중매, 서매의 여럿 집에서 오늘과 내일의 삶을 잇고 있다. 그 풍경이야말로 매원마을의 진실한 얼굴이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