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보드 20장이 각각 독립 스마트폰으로 작동
내가 누른 '공감', 수백 대 기계와 경쟁하고 있었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180만 원이면 살 수 있다. 금속 박스 하나에 스마트폰 메인보드 20장이 꽂혀 있고, 각각이 독립된 안드로이드 기기로 작동한다. 상품명은 '틱톡 & 유튜브 스튜디오 전용 휴대폰 메인보드 통합 섀시 박스'. 비슷한 상품이 10만 개 넘게 팔렸다고 적혀 있다. 버젓이 팔리는 이 장비의 정체는 이른바 '폰팜(Phone Farm)'이다.
6·3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유튜브 정치 채널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지금, 이 같은 장비를 활용한 온라인 여론조작이 민주주의의 새로운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 폰팜, '스마트폰 농장'의 실체
폰팜은 말 그대로 스마트폰 농장이다. 다수의 스마트폰 메인보드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 대량의 온라인 활동을 자동화하는 장치다. 섀시 박스 하나에 보드 8장에서 20장까지 꽂을 수 있고, 200W 전원공급장치 하나면 20대가 동시에 돌아간다. 각 보드가 와이파이나 유심(SIM)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면, 서로 다른 IP 주소가 할당된다.
핵심은 '각각이 진짜 스마트폰'이라는 점이다. PC에서 돌리는 가상머신이나 에뮬레이터가 아니라 물리적 하드웨어다. 유튜브나 네이버 같은 플랫폼의 봇 탐지 시스템을 우회하기가 훨씬 쉽다. 구글 계정을 개별 생성하고 각기 다른 IP를 할당하면, 플랫폼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20명이 접속한 것과 구분하기 어렵다.
진입 장벽도 낮다. 중국 직구 플랫폼에서 보드 8장짜리는 80만~100만 원, 20장짜리는 150만~200만 원에 거래된다. 배송비 포함 200만 원이면 '스마트폰 20대'를 확보할 수 있다. 이 박스를 5대만 연결하면 100대, 10대면 200대. 원룸 한 칸에 수백 대를 설치할 수도 있다.
◇ '여론 공장'의 다섯 가지 무기
폰팜의 본래 용도는 앱 테스트나 라이브 스트리밍 다중 송출이다. 그러나 여론조작에 전용하면 파괴력이 달라진다.
가장 직관적인 것이 유튜브 조회수·좋아요·구독자 조작이다. 각 기기에서 특정 영상을 일정 시간 이상 재생하면 유효 조회수로 잡힌다. 200대를 돌리면 하루 수만 회의 조회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선거철에 특정 후보의 홍보 영상을 '인기 급상승'에 올리거나, 상대 후보 비방 영상의 노출을 끌어올리는 데 쓰인다.
댓글 공감·비공감 조작도 가능하다. 네이버 뉴스에서는 공감을 많이 받은 댓글이 상단에 뜨고, 유튜브에서도 좋아요가 많은 댓글이 '인기 댓글'로 올라간다. 폰팜 200대로 특정 댓글에 일제히 공감을 누르면, 그 댓글이 수만 명의 독자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다. 불리한 댓글은 비공감으로 묻어버릴 수 있다.
SNS 계정 대량 생성도 쉽다. 각 기기마다 별도의 구글·카카오·네이버 계정을 만들면 수백 개의 '유령 시민'이 탄생한다. 이 계정들이 커뮤니티와 뉴스 댓글란에 같은 논조의 글을 동시다발적으로 올리면, 불특정 다수의 자발적 여론처럼 보인다. 검색 트렌드 조작과 라이브 방송 동시 시청자 수 부풀리기까지, 활용 범위는 광범위하다.
◇ 드루킹의 '킹크랩'보다 한 수 위
폰팜 운영의 핵심은 자동화 소프트웨어다. 메인보드를 섀시에 꽂고 전원을 넣으면 각 보드가 안드로이드로 부팅된다. 매크로를 설치하면 앱 실행부터 로그인, 영상 재생, 좋아요 클릭, 댓글 작성까지 사람 손 없이 돌아간다.
IP 위장도 간단하다. 보드마다 유심을 하나씩 꽂으면 이동통신사 IP가 할당되고, VPN을 쓰면 지역별로 다른 IP를 쓸 수 있다. 대구에서 가동하면서 서울·부산·광주에서 접속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 가능하다. 기기별로 GPS 좌표까지 분산시키는 업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드루킹 사건 당시 '킹크랩' 매크로는 하나의 컴퓨터에서 다수의 가상 접속을 시도하는 방식이었다. IP 패턴 분석으로 적발이 가능했다. 폰팜은 다르다. 물리적으로 분리된 실제 기기가 각각 독립된 네트워크로 접속하기 때문에 비정상 트래픽으로 판별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 기술적으로 한 세대 진화한 여론조작 도구인 셈이다.
◇ 장비는 합법, 사용은 회색지대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1월 SNS에서 "가짜뉴스, 댓글이나 공감 조작 같은 여론조작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중대범죄"라며 "경찰이 수사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현행법은 폰팜 같은 신종 수법에 대한 대응에 한계가 있다.
공직선거법 제82조의4는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부정행위를 금지하지만, 매크로 프로그램 자체를 직접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매크로를 통해 재산상 이익을 취하지 않았거나, 실제 서버 장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처벌에 한계가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폰팜은 매크로보다 한 단계 더 정교한 수법인 만큼 법적 공백이 더 크다.
장비 자체도 합법이다. 알리익스프레스 등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및 테스트용'으로 정상 유통되고 있으며, 구매나 보유를 규제하는 법률은 없다. 이를 여론조작에 사용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수사의 핵심 난제다.
◇ 기술·법·제도, 3중 방어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폰팜 여론조작에 기술·법·제도의 3중 방어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기술적으로는 플랫폼의 이상행위 탐지 고도화가 시급하다. 단순 IP 분석을 넘어 기기 고유 식별번호(IMEI), 앱 사용 패턴, 클릭 간격의 통계적 이상치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AI 기반 시스템이 필요하다. 구글은 유튜브에서 봇 탐지에 머신러닝을 적용하고 있지만, 물리적 기기 팜에 특화된 탐지 모델은 아직 초기 단계다.
법적으로는 선거법 개정이 과제다. 선거 기간 중 자동화 도구를 활용한 대량의 온라인 활동에 대한 처벌 근거를 명확히 하고, 조직적 여론조작 장비의 선거 목적 사용에 대한 가중처벌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다.
제도적으로는 선관위와 경찰의 사이버 선거범죄 대응 역량 강화가 관건이다. 검찰은 6·3 선거를 앞두고 선거사범 전담수사반을 편성했고, 경찰청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정확도 92%의 딥페이크 탐지 기술을 실전 배치했다. 그러나 폰팜을 이용한 조회수·댓글 조작까지 모니터링하기에는 인력과 기술 모두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정치평론가는 "180만 원짜리 장비 하나가 수백 명의 '가짜 유권자'를 만들어내는 시대다. 투표함 앞의 1인 1표는 지켜지고 있지만, 온라인 여론이라는 '보이지 않는 투표'에서는 1인이 수백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이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민주주의의 토대가 흔들린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