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속으로] 흑백으로 드러낸, 형태 본연의 아름다움

입력 2026-03-10 16: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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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범 사진전 '존재의 형태'
3월 28일까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전시장에서 만난 주재범 작가. 이연정 기자
전시장에서 만난 주재범 작가. 이연정 기자

흰색 삼합지 위를 유려한 곡선들이 채웠다. 먹의 농담과 강약 조절이 뛰어난 수묵화 같지만, 모두 사진이다. 피사체는 꽃과 나뭇가지 등 식물들. 대구 출신의 주재범 작가는 우리가 쉽게 지나치거나 공들여 바라보지 않는 생명의 또 다른 모습을 포착한다.

작업의 출발은 자신의 삶과 늘 가까이 있던 존재로부터였다.

"항상 집에 꽃이 있을 정도로 꽃을 좋아해요. 하지만 아름다움이 영원하진 않죠. 시들면 버리고 다시 싱싱한 꽃을 사곤 하다가, 제가 50세 되던 해에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주일 간 행복하게 지켜보다가 하루 아침에 쓰레기로 취급하고 버리는 행동이 마치 그 하나의 생명을 배반하는 듯, 너무 무례하다는 느낌이 스스로에게 들었죠."

나도 영원히 피어있지만은 않겠지. 언젠가는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까. 작가는 꽃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였고, 그때부터 꽃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시든 뒤 물을 버리고 빈 병에 다시 꽂아놓은 꽃가지들은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꽃이 머금고 있던 수분들로 인해, 마지막으로 몸부림치듯 미세하게 변화하는 모습이 나타난 것.

그는 "바로 그 때가 진정한 본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순간을 기록하고자 처음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찍으면서 그 안에 내재된 리듬감과 조형성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업 초기에는 컬러 사진이었다. 시들어버린 꽃을 다시 예쁘게 포장해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 2년 반 가량을 한창 작업했지만 되돌아보니 회의감이 들었고, 철학박사이자 스승인 이경홍 경일대 교수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아름답다. 그 이상은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후부터 모든 작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 꽃에 뭘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낸 형태의 아름다움을 담백하게 바라보기로 했죠."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 전경. 이연정 기자

형태를 살리고자 색을 뺐고, 화면에는 오로지 흑백만이 남았다. 조명을 조절해 찍은 사진의 일부를 잘라 확대하니 아웃포커싱된 부분이 두드러지며 자연스럽게 화면에 깊이가 더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수묵으로 그린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로 특유의 간결한 곡선이 살려졌다.

작가는 "예술 분야의 경우 대부분 서양의 작품을 보며, 서양을 기준으로 한 교육을 받는데, 동·서양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서양은 직선적이고 정교한 부분에 집중을 한다면 동양, 특히 한국은 완전히 반대"라고 말했다.

이어 "달항아리도 균형이 정확하지 않은 그 투박함이 오히려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내 작업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꽃의 형태를 그대로 살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추구하는 자연스러움은 작품 전반에서 나타난다. 이전에는 삼합지에 박힌 닥나무 줄기나 겹쳐진 결을 발견하면 오점이라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작업하곤 했지만, 결국 '완전히 깨끗한 종이는 없다'라는 걸 깨닫고는 그대로 사용했다. 이제는 오히려 그 결을 드러내려 액자 유리도 없앴다. 작품 테두리를 둘러싼 액자는 불에 태워 색을 낸 나무로 짰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여백의 미(美)다. 그의 작품을 두고 불교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탁본 명장' 흥선스님은 "흑백으로만 이뤄진 작가의 사진에서 여백은 상당히 결정적이다. 여백이 아니라면 피사체는 자신을 드러낼 방법이 없다. 여백에 의해 피사체는 비로소 생명력을 부여받는다"고 했다.

사진들 중 한 꽃가지는 제멋대로 구부러진 곡선의 형상과 말라비틀어지며 드러난 꼬임이 눈길을 멈추게 한다. 가지는 손가락 두 개를 합한 만큼의 굵기인데, 실제로는 2~3㎜에 불과하다.

"2년 넘게 기다렸다가 찍은 겁니다. 지금은 6년 정도 됐으니 또 형태가 바뀌었겠죠. 아무리 작아도 생명은 그 나름의 존재감과 아우라를 가집니다. 우리가 그간 못봤던 부분을 발견해서 드러내고 싶었어요."

하나도 같은 형태가 없는 꽃 수술들이나 모세혈관처럼 섬세하게 퍼진 꽃 잎맥 등 전시된 사진에서는 존재의 형태를 무심하지만 새롭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김웅기 미술비평가는 "메마른 식물의 껍질이 사진 속에서 애잔한 분위기를 품게 되면서 마치 생명같이 빛나는 그림자가 사진 이미지에 붙어있는 듯이 보인다"고 평했다.

한편 그는 영화 스틸컷과 포스터 작업을 한 독특한 이력도 갖고 있다. 2004년 영화 '청연' 작업을 시작으로 '승리호', '쎄시봉', '블랙머니'를 비롯해 이창동 감독의 '시', '버닝' 등에 참여한 바 있다.

그의 개인전 '존재의 형태'는 오는 28일까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대구 남구 이천로 139)에서 이어진다. 일,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