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여 개 언어의 시대…다른 언어를 배우면 다른 사람이 된다

입력 2026-03-05 10: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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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
비오리카 마리안 지음/신견식 번역/위즈덤하우스 펴냄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의 단서가 된 유물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의 단서가 된 유물 '로제타석'. 최현정 기자

영국 대영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유물로 '로제타석'이 있다. 박물관의 대표 유물인 이 비문은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의 열쇠로 불린다. 수천 년 동안 학자들이 읽지 못했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기원전 196년에 만들어진 이 비문에는 같은 내용이 세 가지 다른 기호로 기록돼있다. 같은 내용이 이집트 상형문자(신전과 종교용), 이집트 민중문자(일상 행정문서용), 고대 그리스어(당시 지배층 언어) 세 가지 문자로 새겨져 있어 비교가 가능했고, 이것이 문자 해독의 핵심 단서가 된 것이다. 동시에 로제타석은 다중언어 사용의 역사를 증명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2천200여 년 전에 이미 일부 이집트인들은 다중언어 구사자였던 것을 보여준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일정한 규칙을 가진 코드를 만들어왔고, 또 여러 코드를 익혀왔다. 현재 전 세계에는 7천 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한다. 많은 언어가 빠르게 소멸되고 있지만, 그만큼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국어를 넘어 자바 스크립트, C#과 같은 컴퓨터 언어도 있고, 클링온어처럼 창작물에서 만들어져 온라인 언어 학습 앱에 등록된 언어도 있다. 또 에스페란토처럼 연구와 국제 의사소통을 위해 만든 언어도 있다.

'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 책 표지

이처럼 언어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다중언어 구사에 능숙하다.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영어를 배우고, 제2 외국어를 익히고, 여러 가지 소통 코드를 해석하며 살아간다. 언어와 정신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하는 '심리언어학'의 권위자인 저자는 이번 신간을 통해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것의 영향력과 상호작용을 설명한다. 특히 10여 개의 언어가 가능한 저자는 다중언어 사용자로서의 경험담을 예시로 함께 담아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우리가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쓸 때마다 사고의 틀이 확장돼 또 다른 자아가 된다고 말한다. 예로 다섯 명을 죽일 것인지, 한 명을 죽일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트롤리 딜레마'의 경우에서 같은 사람이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답할 경우에 더 공리주의적인 선택을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할 때 더 논리적이고 사회적 이익이 큰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또 다중언어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이들의 뇌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항상 활성화된 상태로 남아 저절로 동시에 일을 처리하는 '병렬 활성화'가 증명됐다. 특히 이들은 전두엽에서 신경 세포체를 수용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회백질의 밀도가 더 높았는데, 이는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면 노화로 인한 인지 저하로부터 뇌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치매 발병도 평균 4~6년 늦추는 등 여러 언어를 하면 뇌가 건강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모국어를 완벽히 구사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이 많은데, 저자는 어릴 때부터 배울수록 좋다고 말한다. 유아의 인지는 말하기 전부터 정교해서, 언어에 따른 개인의 다양한 면모를 일찍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내가 어떤 말을 쓰는지에 따라 내면에 있던 새로운 측면과 잠재력이 드러나는 멋진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나. 우리는 매일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말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AI)이 순식간에 언어를 번역해주는 시대지만, 편안함을 이겨내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우리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끌어 줄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말한다. "다른 언어를 배우기에 너무 늦거나 이른 때는 없다. 언제든 시작하면 된다. 재미까지 얻을 수도 있다" (239p). 288쪽,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