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황성옛터'는 역사적 서정시이다. 망국의 진혼시(鎭魂詩)이다.
'황성옛터'의 정서는 옛 시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말 충신 길재가 옛 도읍지를 외로이 찾아 읊은 시조는 '황성옛터'의 서시(序詩)와 다름이 없다. 특히 중장의 '산천은 의구하되...'라는 대목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춘망'(春望)을 떠올린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 '나라가 망했어도 산과 강은 그대로인데, 성 안에 봄이 오니 초목만 무성하구나'. '황성옛터' 2절 가사의 첫 구절은 이같은 옛시조와 고전 한시의 페허적 감성을 떠올리며 역사의 허무와 망국의 정한을 토로하고 있다. 쓸쓸한 옛 도읍의 정경을 식민지 민중의 상실감으로 변주한 대중가요의 문학적 결정체인 것이다.
폐허로 전락한 '황성'(荒城)은 당시 조선인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역사적 공간이 개인의 내면 풍경으로 전이되었다가 다시 집단정서로 확산된다. '황성'의 월색(月色)은 밝아서 더 시리다. 인간사의 비극과 세월의 무상함을 무심히 비출 뿐이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식민지 현실을 떠도는 민중적 자아이다. 그래서 노래 속 화자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근대적 유랑의식이다.
옛터의 달밤은 공동체 붕괴(國破) 이후의 실존적 고독을 은유한다. 구슬픈 벌레 소리가 시사하는 가을과 쇠락의 의미와도 겹친다. 무언(無言)의 비애(悲哀)이다. 역사와 삶은 무너졌는데 초목은 여전히 푸르니 인생의 덧없음이 더욱 부각된다. '황성옛터'는 염세와 체념의 정서가 배어 있다. 하지만 '사의 찬미'와 같은 완전한 침잠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망국의 현실을 환기하는 메타포이다.
황성의 옛터를 망국의 노래로 승화시킨 주인공들은 1930년대 유랑극단 단원들이었다. 만주 공연을 거쳐 황해도에 이른 어느날 작곡가 전수린은 악극단장인 작사가 왕평과 함께 고려의 궁궐터를 찾았다. 개성 만월대에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들이 잡초 사이로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적막한 달빛 아래 풀벌레 소리만 서러움을 더 할 따름이었다.
궂은 비 내리는 어느날, 그러잖아도 지향없는 나그네 심사에 젖어 여관방을 서성거리던 전수린은 바이올린을 꺼내들었다. 만월대에서의 그 고적한 감회를 구슬픈 선율로 자아냈다. 황성 옛터의 달빛에 함께 젖었던 왕평이 여기에 가사를 붙였다. 대중가요 '황성옛터'의 탄생 비화이다. 노래는 1928년 서울 단성사에서 열린 극단 취성좌의 공연 중 이애리수가 처음 불렀다.
경북 영천 출신의 작사가 왕평(본명 이응호)은 그렇게 노랫말로 시대를 기록한 시인이 되었다. 유랑극단에 몸을 싣고 정처없이 떠돌던 문인예술가들의 회고적 감성을 민족 서사(敍事)로 확장한 식민지 비가(悲歌)의 창시자였다. '황성옛터'는 역사적 폐허를 무대로 개인의 고독과 시대의 상실을 아우르며 한시와 시조 그리고 근대시의 전통을 대중가요로 응축한 대표적 작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