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국 흡수 통합 방식, 삼국통일 추진 사상·제도적 모델"
다수 소규모 정치 단위 연결 구조…농·어업·수공업 결합된 복합생계
혈연 공동체·신앙 공동체 가까워
소국 지배층 배제 않고 신귀족 편입…박·석·김 씨 교대로 왕위 계승 구조
◆신라는 초기부터 국가가 아니었다
신라에 대해서 갖고 있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된 이래 초기부터 하나의 통일된 국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삼국사기』가 신라의 시조를 박혁거세로 하고, 즉위를 기원전 57년으로 기록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재서술한 기록을 곧 바로 고대 국가로서의 실체와 동일시하는 데에는 문제점들이 따른다.
무엇보다 '건국 연대'와 '국가 형성'은 구분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대 국가의 신화와 역사 사실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왕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서사적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이를 곧바로 중앙집권적 국가의 성립 시점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신라'라는 국호 자체는 건국한 초기부터 사용된 명칭이 아니다. 처음에는 서라벌(徐羅伐)', 사라, 사로, 서벌, 계림, 신라 등으로 불리워졌다. 지증왕 4년(503년)에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글자를 선택해 '신라(新羅)'로 선포한 것이다.
◆진한 소국은 경상도 일대의 복합 연맹체
중국의 『사기』, 『한서』, 특히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비롯한 기록들을 보면,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현재의 경상북도 일대에는 '삼한 질서'에 속한 진한 12소국이 존재했다.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웠다는 기록처럼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켜온 토착 집단과 고조선이 붕괴한 후에 남하한 유민 세력이 결합해 형성한 연맹형 정치체였다. 즉 통합된 신라는 단일 종족이나 단일 권력에 의해 일시에 성립한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소규모 정치 단위들이 장기간 느슨하게 연결된 구조였다. 규모는 크게는 대략 4,000에서 5000가(家), 작은 것은 약 600에서 700가(家)로 구성됐다. 분포한 범위는 오늘날의 경주·대구·영천·청도·포항 등 경상북도 내륙과 포항 영덕 등 동해 남부 연안 일대에 해당한다. 독자적인 생활권과 신앙 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서로 간에는 정치적 위계가 수평적인 성격이 강했다.
대표적인 소국인 사로국(斯盧國)은 경주 분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이서국(伊西國)은 대구 달성과 현풍 일대를 중심 영역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파사왕 23년(102년)조에는 사로국이 이서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진한 내부에서 이미 군사적 충돌과 세력 재편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다만 이서국은 즉각 소멸한 것이 아니라, 3세기말까지 존속하다가 점진적으로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김천 일대의 감문국(甘文國)은 큰 고분군이 밀집해있으며, 출토된 유물의 위계와 규모로 보아 비교적 강력한 정치체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도 일대의 근기국(斤伎國) 또한 낙동강 수계와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에 위치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규모가 작은 소국들에 대해서도 최근의 고고학인 성과를 토대로 비정이 이루어진다. 영일만 내륙의 도기국, 영천·신녕 일대의 불사국, 경산·하양의 미리미동국, 영천 북부의 우유국, 경주 서북 산간의 호로국, 포항 내륙과 영일만을 잇는 주조마국, 경주 남부의 군미국, 경주 동부의 여마국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신라 역사의 초기 기록들을 보면 또 다른 소국들이 존재했음을 알수 있다.
소국들은 무작위로 흩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생태환경을 고려하면서 일정한 공간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경주 분지권' '대구–금호강권' '영천–청도 내륙권' '동해 연안 연결권'이라는 몇 개의 권역이 상호 연결된 다핵 구조였다. 단일 중심이 아닌 복수의 중심이 공존하는 연맹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지경학적 조건 역시 이러한 다핵 연결구조를 뒷받침했다. 진한 지역은 산지가 많아 대규모 평야 농업에는 불리했으나, 골짜기 농업과 소규모 경작에는 적합했다. 동시에 백두대간에서 동해까지 연결된 낙동강의 상·중류 수계망을 통해 강상 물류와 강어업이 발달했고, 동해 연안을 따라 연안어업과 원양어업도 이루어졌다. 즉 소규모지만 농업·어업·수공업이 결합된 복합생계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소국들은 기본적인 생활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외부 교역에 대한 의존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 결과 정치 공동체의 성격은 '영토 국가'라기보다는 혈연, 제의와 생활권이 정치 질서를 떠받치는 '혈연공동체' '신앙 공동체'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내부 상황이 복잡해지고, 외부 세력의 압력이 커질수록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각각의 소국들은 경쟁을 통해 살아남거나, 통합을 통해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야 했다. 주도권을 장악하는 소국의 등장이 불가피해졌다.
◆사로국이 소국들을 통합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소국들 가운데에서 사로국이 독자적인 외교·군사의 주체로서 기능해지는 시점은 고고학 자료와 문헌 기록들을 종합하면, 대체로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초기부터 이서국(청도), 우시산국(울산), 거칠산국(부산)을, 이어 2세기 들어서면 비지국(창녕), 다벌국(대구), 초팔국(합천), 실직곡국(삼척), 압독국(경산)을 복속시켰고, 계속해서 231년의 조문국(의성)과 236년의 골벌국(영천)에 이르기까지 많은 소국들을 병합했다. 이어 2단계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를 전후이다. 진한 소국들의 명칭이 문헌에서 사라지고, 고분 구조·부장품 구성·토기 양식 등에서 단일 문화권의 특징이 뚜렷해진다. 이 현상은 신라가 '허약한 연맹체제'에서 '실질적인 고대국가'로 이행하는 전환점임을 알려준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로국은 중심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첫째는 경주 지역이 지닌 생태·지리적 조건이다. 내륙 분지에 위치해 넓은 농토를 확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외부 침입을 방어하는데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형산강을 통해 영일만과 연결되면서, 내륙과 강과 해양을 동시에 활용하는 강해 교통망을 보유했다. 또한 토기 문화와 유물의 분포도를 보면, 동해남부 해안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연해주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동해 연근해 항로의 중간 거점 역할을 해왔다. 더 나아가 일본 야요이 시대에 혼슈 남부의 시마네현 지역 등과 교류한 흔적들도 확인된다. 아달왕때 사건인 '연오랑·세오녀' 기록은 설화가 아니라, 이러한 해상 교류와 이동의 기억을 반영한 서사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경주는 항구도시로서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교통의 허브였음을 발표했다.(『해양역사상과 항구도시들』)
경제적인 기반 또한 중요했다. 경주의 주변 지역은 철과 사금, 석재, 점토 등의 고부가 가치 자원들이 비교적 풍부해 수공업과 무기 제작이 가능했고, 풍부한 수자원으로 농업 또한 일정 수준 유지되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묘사된 고래 사냥 장면은 동해 연안에서 해양 어업이 신석기 시대부터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해양 활동은 곧 교역으로 이어졌고, 이는 사로국이 성장하는 속도를 가속화시켰다.
둘째 요인은 사로국의 종교적 역할과 위상이다. 건국된 초기부터 정치와 제의가 분리되지 않은 구조를 유지했다. 건국자인 박혁거세의 이름에서 '박(朴)'은 밝음을, '혁(赫)'은 빛남을 뜻하며, 거서간의 '간'은 알타이 문화권에서 군주를 의미한다. 단순한 인명이 아니라, 제의적 권위를 지닌 군주의 성격임을 반영한다. 2대 임금인 남해의 칭호인 차차웅(또는 자충)은 무당이나 제사장을 뜻하며, 3대인 유리 이후 약 350년 동안 호칭으로 사용된 '이사금' 의 '금' 역시 알타이어의 '감' '검' '곰' '고마' '개마' 등과 같이 무당·신을 의미하는 어근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이 시기까지의 사로국의 군주는 정치적 수장이면서 종교적인 지도자였다. 이러한 구조는 사로국이 진한 연맹 내에서 마한의 '소도'처럼 제의적 중심지를 보유한 일종의 성소국가로 기능하게 했을 것이다.
셋째는 외부 정치 환경의 변화다. 남쪽에서는 가야가 해양 도시국가적 성격을 바탕으로 국제 교역을 확대하며 국력을 키웠고, 3세기말 쯤부터 신라와 갈등을 벌였다. 서쪽에서는 마한을 통합한 백제는 4세기 중반부터 압박을 가했다. 심지어는 왜구의 침입이 자주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한 소국들은 개별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고, 이 시기를 전후해 사로국 중심의 통합은 사실상 완성 단계에 들어선다. 여기에 400년에 광개토태왕이 보기 5만을 신라 영내로 진격시킨 사건은 진한 지역의 정치 체제와 군사 조직, 세계관 자체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03년에 지증 마립간은 임금의 칭호를 '왕'으로 변경하고 국호도 신라로 확정했다. 이 무렵에 백제와 가야 또한 국명을 한자식으로 정비하며 고대 국가로서의 외형을 갖춘다.
◆신라의 통합 방식과 체제는 한국사회의 모델
사로국이 중핵이 되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방식과 과정은 매우 독특하다. 패배한 소국들의 지배층은 배제하지 않고 신귀족으로 편입했으며, 골품제와 관등제를 통해 국가 질서 안으로 흡수했다. 사로국은 초기부터 박·석·김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는 합의적 구조를 활용해서 초기의 분열을 해소시키고 결속을 강화시키는 체제였다. 확장해가는 신라는 이러한 시스템과 세계관을 활용하여 군사력을 동원한 단 번의 정복이나 강압적인 통합을 추진하지 않았다. 물론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보면 전투 행위들이 몇 차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교역을 통한 연결, 동맹의 확대, 제의 체계의 통합, 행정 질서의 편입, 그리고 제한적인 군사 압박들이 장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최근에 골벌국으로 비정되는 영천의 완산동 고분에서 5세기말 6세기 초의 것인 금동관, 유리구슬 목걸이, 금동제마구류 등이 출토됐다. 이것은 소국 세력들의 자율성이 오랜기간 동안 보장됐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필자는 시로국이 성공시킨 고구려·백제· 가야 등과 차별성있는 통합 방식은 이후 약소국인 신라가 삼국 통일을 추진하는 사상적인 기반과 제도적인 모델이 되었다고 판단한다. 아울러 오늘날 지역 분열과 갈등, 통합의 방식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현실에서 검토하고 모델이 될만한 역사적인 사례로 보고 있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