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백강의 한국 고대사] 광복 80주년에 되돌아본 단재 신채호 민족사학의 공과(功過)

입력 2025-12-08 11: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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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범주를 만주까지 확대한 단재 신채호 선생
한국사의 범주를 만주까지 확대한 단재 신채호 선생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1월 7일 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나 1936년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중국의 여순 감옥에서 5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단재는 꿈에 그리던 1945년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일제 치하에서 살다가 일제의 감옥에서 병사했으니 불우한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1910년 한양조선이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을 때 단재의 나이 31세였다. 한참 국가와 민족을 위해 활발히 활동할 나이에 나라를 잃어버린 단재는 그 후 중국의 상해, 북경, 러시아의 연해주 등지를 떠돌며 망명객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불행한 대일항쟁기에 태어나 안중근, 윤봉길 의사 같은 분들은 사생취의(捨生取義), 즉 직접 목숨을 바쳐 피로써 독립운동을 하였다.

한편 암울한 망국의 현실을 당하여 역사 속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일생 전심전력을 다한 분은 단재 신채호이다. 단재는 우리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대륙을 지배한 위대한 역사임을 널리 알려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그가 남긴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은 식민 반도사관을 깨고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를 한반도에서 만주지역까지 확대시킴으로써 기존의 역사 인식을 확 바꾼 파격적인 연구였다.

다만 단재의 연구가 당시로서는 식민주의 반도사학을 부수는 망치와 같은 역할을 하였지만 단재 사후 9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 와서 살펴보면 단재의 한계와 문제점 또한 발견된다. 그 실례 몇 가지를 아래에서 단재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당나라 때 안동도호부가 하북도 평주에 설치되었다고 기록한 두우의 통전,
당나라 때 안동도호부가 하북도 평주에 설치되었다고 기록한 두우의 통전,

◆한사군에 대한 단재의 오류

단재는 '조선상고사' 제4편 제2장 열국의 분립과 제3장 한무제의 침구(侵寇) 등에서,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이 현재의 요녕성 동쪽 해성, 개평 등지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전한서' 가연지열전에는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서 현도군, 낙랑군을 설치하였다.(東過碣石 以玄菟樂浪爲郡)"라고 말하였다.

갈석산은 중국 하북성 쪽에 있다. 한무제가 만일 지금의 요녕성 동쪽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면, '전한서'에 해성시, 개주시 서쪽에 위치한 명산인 의무려산(醫巫閭山)을 지나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말하지 갈석산을 지나서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한 강단사학은 물론 요녕성 동쪽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한 단재 역시 오류를 범한 것이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대한 단재의 오류

당나라 때 두우(杜佑)가 쓴 '통전(通典)'의 주군(州郡) 안동도호부 조항에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시대에 고구려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당시의 하북도 평주에 수도를 정했는데 당나라 고종 원년(668년)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정하고 거기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단재는 수, 당시대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음의 기록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좌익위대장군 수군총관 내호아(來護兒)와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군량을 실은 배들을 거느리고 해로를 따라 대동강으로 들어가서 우문술과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기로 했다."

단재는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대동강 유역이 아닌 발해의 해변 당시의 하북도 평주, 현재의 중국 하북성 창려현, 노룡현 일대에 있었고 그곳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단재가 저술한 조선상고사
단재가 저술한 조선상고사

◆고구려의 패강(浿江)에 대한 단재의 오류

패강은 패수를 말한다. 패수는 고조선과 고구려 시대에 수도 평양 서쪽에 있던 강이다. 단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익위대장군 내호아가 동래 지금의 연태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건너 패강 입구로 들어왔다."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가 비밀리에 수군 장졸들을 구석진 곳에 감추어두고 평양성 아래의 인가에는 재물과 돈을 떨어뜨려 놓고 수나라 군사들이 상륙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호아가 정예병 4만 명을 뽑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성 밑으로 돌진했다."

이는 단재가 한, 당시대의 패강을 오늘의 대동강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단재는 '살수전'이란 제목으로 쓴 글에서 고구려군의 패강 승전에 대해 다루었는데 고구려의 패강이 현재의 대동강이라는 전제하에서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수, 당 시대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노룡현 일대에 있었다면 고구려 수도 서쪽에 있던 패강이 오늘날의 대동강이 될 수는 없다.

고구려의 패강은 고조선의 패수이고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보다는 하북성 진황도시 서쪽, 북경시 북쪽의 백하(白河)로 보는 것이 우선 발음상 가깝다. 또한 '사고전서'의 기록에 의하면 패수를 북경 북쪽의 백하로 보아야만 당시의 역사 사실과 부합된다.

◆고구려의 살수(薩水)에 대한 단재의 오류

"을지문덕은 이때 이미 대동강 싸움에서의 승전보를 들었고 또 우문술 등 수군에 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미 필승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수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패하니 우문술 등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 사람들은 하잘 것이 없구나'하며 내리 길게 몰아쳐 와서 살수를 건너 평양에 이르렀다."

이는 단재가 살수대첩을 설명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살수에 대해 단재는 자신이 직접 주석을 하여 청천강이라고 표기하였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하북성 진황도시에 있었고 패강이 대동강이 아닌 북경 북쪽의 백하라면 을지문덕이 수군을 상대로 대첩을 거둔 살수가 청천강이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고구려의 서쪽 경계에 대한 단재의 오류

단재는 '조선상고사' 제9편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 대해 상세히 다루었는데 거기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방에 고구려가 있어서 조선의 서북 –지금의 황해, 평안, 함경 3도와 지금의 봉천, 길림, 흑룡강 3성-을 전부 차지했다."

이는 단재는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와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동북 3성만을 차지한 것으로 인식하고 지금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 동남쪽 일대가 모두 고구려 영토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단재는 수양제의 좌우 12군의 경유지에 나오는 지명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해는 지금의 강화이고 옥저는 함경도와 훈춘 등지이고 임둔과 동이는 지금의 강원도이니 평양에 총집결하는 수나라 군대가 어찌 훈춘이나 함북이나 평양 이남의 땅으로 나갔겠는가."

단재는 수, 당 시대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믿고 명해, 옥저, 임둔, 동이는 하북성 서쪽에서 하북성 동쪽에 걸쳐 있었던 고구려의 지명이란 사실을 알지 못한 데서 위와 같은 오류를 범했다.

단재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하북성 남쪽 역수(易水) 유역의 탁군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하였고 역수 이동의 북경 일대는 모두 고구려 땅이었으며 그래서 수나라의 좌우 12군이 하북성 남쪽 탁군에 집결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평양에 집결하는 수나라 군대가 경유하는 곳의 지명들이 압록강 서쪽이 아닌 하북성 남쪽 역수 유역에서 하북성 동쪽에 걸쳐 있었던 지명임을 알지 못했으므로 단재는 '수서'나 '자치통감'에 나오는 수나라 12군의 경유지 지명이 본래의 지명이 아니라 임시로 지정한 지명이라는 억지 주장까지 펼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단재가 만주 즉 동북 3성만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하고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하북성 동남쪽까지 포함됐다는 역사 인식이 부족했던 데서 초래된 오류라고 하겠다.

◆단재사학이 범한 한계와 오류를 발견하게 된 원인

한국사의 범주를 청천강 이남에서 동북 3성으로 확대시킨 단재 사학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단재사학의 한계와 오류를 지적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것은 광복 80년 세월이 흐른 지금 만리장성 밖의 홍산문화 유적이 발굴되어 고고학적 성과가 진척되고 또 8만 권에 달하는 사료를 집대성한 '사고전서'가 전자화되어 누구나 검색과 이용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즉 문헌적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단재 당시보다는 훨씬 더 많이 진척된 것을 그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단재가 중국에서 활동할 때 '사고전서'를 접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그가 생전에 '사고전서'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때는 '사고전서'가 지금처럼 영인되어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또한 검색작업도 불가능했다.

단재가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8만 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어떻게 짧은 기간에 다 열람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단재는 '무경총요'에서 북경 북쪽에 송나라 때까지 조선하라는 강이 존재했었다고 밝힌 내용을 몰랐고 하북성 노룡현에 송나라 때까지 고조선의 조선성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말한 '태평환우기'의 기록도 살피지 못했다. 하북성 노룡현 옛 고죽국 지역에서 고조선이 건국했다고 말한 두로공신도비문도 접하지 못했고 두우의 '통전'에 나오는 수, 당 시대에 고구려가 하북도 평주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단재는 한국상고사의 범주를 만주의 동북 3성으로 확대하는 데 기여는 했지만 고조선, 고구려의 수도 평양, 패강, 살수 등을 모두 현재의 북한 평양, 대동강, 청천강으로 간주하는 강단 사학과 동일한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단재는 한국 민족사학의 체계를 세운 인물이다. 오늘의 우리는 망국의 시대에 태어나 망명객의 신분으로 풍찬노숙하면서 이루어낸 단재의 조선상고사에서의 뛰어난 업적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공과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광복 80주년 새로운 민족정사(民族正史) 정립해야 한다

단재가 여순형무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일보 신영우(申榮雨) 기자가 단재를 찾아가 인터뷰한 단재 옥중회견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최근 수개월 전부터 우리 신문 지상에 그가 30여 년간의 깊은 연구와 세밀하고 넓은 조사와 꾸준하고 절륜한 노력을 경주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가 비로소 대중적으로 계속 발표 소개되었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오랫동안 노력하여 저작한 역사가 조선일보 지상에 매일 계속 발표되고 있음을 아십니까." 단재가 답했다. "네 알기는 알았습니다만 그 발표를 중지시켜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비록 큰 노력을 하여서 쓴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단정적 연구가 되어서 도저히 자신이 없고 완벽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10년의 고역을 무사히 마치고 나가게 된다면 다시 정정(訂正)하여 발표하고자 합니다."

자기의 원고가 완벽하지 않아서 나중에 정정하여 발표하려고 하니 조선일보에 발표를 중지시켜달라고 말한 것을 본다면 그의 연구가 보완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단재도 자인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80주년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통설이 바탕이 된 식민 반도사학과 단절하고 단재사학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고 그간에 새로 발굴된 홍산문화의 고고 유적과 '사고전서'의 방대한 문헌사료를 우리 역사연구에 포함시켜 21세기를 열어갈 새로운 한민족의 바른역사, 민족정사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심백강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