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초대석-김형준] 분노와 투쟁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입력 2025-11-03 11:39:35 수정 2025-11-03 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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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전 한국선거학회장)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전 한국선거학회장)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전 한국선거학회장)

한국이 의장국을 맡은 2025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1일 'APEC 정상 경주 선언'을 채택하며 마무리됐다. 교착 상태였던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됐고, 이재명 대통령은 미·중·일 정상들과 회담을 가졌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APEC 회의가 성공적이라고 자축하는 분위기다. 당장 한국갤럽 10월 5주(28~30일) 조사에서 이재명 대통령 지지도는 지난주 대비 1%포인트(p) 상승하면서 57%를 기록했다.

이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 이유로 외교가 23%로 가장 많았다. 정당 지지도는 민주당 41%, 국민의힘 26%였다. 캄보디아 사태, 수요 억제 중심의 과격한 부동산 정책, 김현지 대통령실 부속실장 의혹,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추미애 법사위원장과 최민희 과방위원장의 추태 등 수많은 악재 속에서 정부 여당은 선방하고 있다.

반면, 국민의힘 지지도는 20%대 중반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분노와 대여 투쟁에만 집중하면서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무엇보다 '가치 기반 리더십'과 '감정 전환 전략 맵'이 필요하다.

가치 기반 리더십이란 리더 개인과 조직의 핵심 가치를 모든 의사결정, 행동, 그리고 조직 문화의 가장 중심적인 기준으로 삼아 조직 구성원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끄는 리더십 스타일이다. 과거의 리더십이 '통제와 지시'를 통해 성과를 강제했다면, 가치 기반 리더십은 '영감과 동기 부여'를 통해 지지자와 당원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리더가 명확한 가치를 제시하고, 그 가치에 부합하는 비전을 공유할 때, 당원들은 자신의 업무가 그 큰 목적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외부적인 보상을 넘어 내재적 동기를 촉발한다. 결과적으로 강한 정당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현재 국민의힘에는 AI 대전환 시대에 지향하는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국민의힘이 공허하고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재명, 김현지, 추미애, 최민희 등에 대한 파상적인 공격만으로는 지지도를 끌어올리지 못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불공정, 부패, 그리고 반복되는 실망이 만들어 낸 분노와 불신이 정치판을 흔들 수 있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통령과 연관이 있는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과 관련한 민간업자 1심 판결이 나오자마자 '재판중지법'을 이달 안으로 재추진하기로 했다. 이는 국민의 감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이 감정을 '변화의 에너지'로 설계해야 한다. 이를 '감정 전환 전략 맵'이라 부른다.

이런 전략 맵의 역할은 분노의 감정을 '파괴의 힘'이 아닌 '변화의 동력'으로 설계하는 일이다. 국민의힘이 국민의 실망과 분노와 감정을 읽되, 그 위에 대안의 구조를 설계하는 지도를 그릴 때 비로소 감정은 비전으로 전환되어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 전략은 다섯 단계로 구성된다. 첫째, 분노와 불신의 근원을 진단한다. 둘째, 유권자의 감정을 정당화하고 공감한다. 셋째, 감정을 정의감과 책임 의식으로 바꾼다. 넷째, 이를 구체적 비전으로 연결한다. 다섯째, 행동과 참여로 완결한다.

미국 대선에서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의 절망을 '뉴딜(New Deal)'이라는 희망으로 전환했다. 1992년 빌 클린턴은 경기 침체의 분노를 '경제 회복'이라는 현실적 비전으로 바꿨다. 2000년 조지 W. 부시는 불평등 사회에 대해 '온정적 보수'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다. 2018년 버락 오바마는 정치 불신을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집단적 참여의 감정으로 승화시켰다. 루스벨트의 희망, 클린턴의 공감, 부시의 포용, 오바마의 변화는 감정의 재구성에서 시작되었고, 모두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한국 정치도 예외가 아니다. 유권자의 분노와 불신은 단지 정권 심판의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설계할 '에너지 자원'이다. 국민의힘은 국민 감정에 공감하되, 그 감정을 제도와 비전으로 구조화해야 한다. 불신을 개혁으로, 분노를 공정으로, 냉소를 참여로 바꾸는 전략이 필요하다.

감정은 정치의 연료다. 방향 없는 분노는 어둠이고, 설계된 분노는 빛이 된다. 지금 국민의힘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보수의 가치에 기반한 비전을 제시해 국민들이 신뢰하고 희망을 걸 수 있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감정의 재구성, 철저한 자기반성과 혁신, 그리고 다양성과 포용력을 갖춘 외연 확장만이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