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킬로미터를 달려 비토대교를 지나면, 별주부전(鼈主簿傳)의 배경이 되는 설화 속 비토섬이 보인다. '비토섬'은 경남 사천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마을 사람들은 '사천 끝섬'이라고도 부른다. 이 섬이 별주부전에 등장하는 거북이와 토선생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알면 다들 "고뤠?"라며 깜짝 놀란다. 전설은 이렇다. 비토섬은 날 비(飛), 토끼 토(兎)를 써서 '토끼가 날아오른 섬'이라는 뜻이고, 인근 월등도, 거북섬, 토끼섬, 묵섬 등이 별주부전의 배경이 되었다. 판소리 〈수궁가(水宮歌)〉에는 "갑신년 중하월에 남해 광리왕이 영덕전을 새로 짓고 대연을 베풀 제"라는 대목이 나온다. 옛부터 사천 바다에 내려오는 전설에 등장하는 '광리왕'은 남해 용왕(龍王)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비토섬과 월등도의 지명 설화가 별주부전의 배경이 된 셈이다. 사천 앞바다의 섬들이 토선생과 별주부(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설화의 '원조 논란'은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다. 사천시 서포면 용궁로 132번지 일대에는 대대적으로 별주부 선생 테마파크를 조성해 사천이 별주부전 출생지임을 알리고 있다. 어린이와 가족 단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주변 식당과 펜션, 상점 이름도 '별주부 카페', '토선생 식당' 등으로 용궁로 일대가 별주부 마을처럼 변모했다. 배를 타고 비토섬을 한 바퀴 돌아 거북섬, 토끼섬을 왕복하는 코스도 있으니, 국민 전래동화인 〈별주부전〉을 책으로 읽는 것보다 현장 체험이 더 실감 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별주부전은 토끼와 거북, 용왕이 주인공인데, 사천 전설에는 토끼의 아내까지 등장해 애틋한 부부애를 보여준다. 남해 용궁(龍宮)으로 간 토 선생을 기다리다 보름달 뜨는 날, 아내는 기다림 끝에 죽고, 목숨을 내놓으라는 용왕 앞에서 간경화에 시달릴 뻔한 토선생은 "한 달 중 달이 커지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간을 꺼내어 말리는데, 지금이 음력 열닷새라 월등도 산 중턱 계수나무에 걸어두고 왔다"고 거짓말을 해 구사일생으로 월등도 앞바다까지 돌아온다. 생존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난다. 토 선생은 달빛 육지를 실제 육지인 줄 알고 뛰어내리다 바닷물에 떨어져 죽고, 그 자리가 토끼섬이 된다. 토끼 간을 얻지 못한 자라도 용궁으로 돌아갈 수 없어 떨어져 죽은 섬이 거북섬이 되었고, 토끼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다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는 것이 경남 사천 별주부전의 이야기다. 사천의 전설을 모티브로 삼아 지역 소재 연극으로 개발해낸 작품이 경남 사천시의 유일한 극단인 장자번덕의 〈토끼날다〉(기획, 김종필, 작 김인경, 연출 이훈호, 사천문화예술회관)이다.
◇ 가무백희로 다시 읽는 '경남 사천으로 토끼 날다', 별주부전
요즘 충북·경남 지역의 '지역성 있는 이야기'를 콘텐츠로 삼아 다양한 작품을 써오고 있는 김인경 작가는, 1990년 창단한 놀이패 우금치 단원으로 창작 농촌 마당극 〈호미풀이〉에서 배우로 데뷔한 이답게 마당극이 전문 분야다. 극작가로서는 1999년, 가정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을 문제 삼은 여성 마당극 〈북어가 끓이는 해장국〉으로 활동을 이어왔다. 2000년에 우금치를 그만두고 '마당극단 좋다'를 창단해 초대 대표를 맡았고, 극작·배우·연출을 병행하며 활동했다. 현재는 충북 청주의 (사)예술공장 두레에서 예술단장을 맡고 있다. 작가의 극작 세계는 지역에만 매몰되지 않고, 민중(民衆)의 서러움과 역사의 정서를 '마당'이라는 형식 속에서 적극적으로 재창조하는 데 특징이 있다. 익살과 해학, 풍자와 놀이, 연희와 전통을 텍스트로 구조화해 녹여내는 마당극의 특성은 〈토끼날다〉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번 작품에서는 전설(설화)의 불확정성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덧붙여 비토섬의 전설을 우화적으로 확장했다. 별주부전의 기본 골격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다.
고전 별주부전의 핵심이 용궁으로 끌려간 토끼와 그 간, 별주부와 용궁 세계의 관계라면, 〈토끼날다〉는 비토섬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토선생 부부의 이야기에 평화와 사랑의 정신을 강조하고, 가장의 무게감과 인구 소멸 시대의 다산(多産) 부부의 가족애까지 밀어 넣는다. 별주부를 통해서는 '화합'의 정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토끼날다〉의 용궁 장면에서는 토선생이 육지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용왕을 설득하는 방식이 다르게 변주되고, 마지막에는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아내,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죽게 되어 섬이 되어버린 비극으로 끝난다. 아내에게 헌신하는 부부애는 짠하게 다가오고, 비토섬에서 떡을 팔다 왈짜패를 만나 전 재산을 빼앗긴 뒤에도 다시 떡을 팔며 아이를 낳아 세상에 떵떵거리게 살다가 "한날한시에 죽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소박한 소시민의 우화적 정신도 담겨 있다. 정리하면, 부부가 살아가는 곳은 월등도이고, 가끔 물때를 맞춰 시내인 비토섬으로 나와 떡을 팔며 살아가는 것이 생업이다. 그런 만큼 무대의 배경은 월등도이며, 가끔 비토섬으로 떡을 팔러 다니는 금실 좋은 토끼 부부 토갑(최상태 분)과 토실(이사라 분)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용궁 세계에서 탈출해 성공한 토선생의 설정은 '덤'에 가깝다.
극단 장자번덕의 〈토끼, 날다〉는 사천시의 전통 설화 「별주부전」을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해학성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가족 부양의 책임과 노동, 토끼를 중심으로 한 생존의 윤리성까지 폭넓게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토끼는 용궁의 권력을 조롱하는 영리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家長)으로서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민중적 주체로 재구성된다. 〈토끼, 날다〉는 돌당섬–비토섬–용궁–달이라는 네 개의 주요 공간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토갑은 전통 설화 속 토끼와 달리 아내 토실과 태어날 아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 한국 사회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런 만큼 돌당섬과 비토섬은 생업의 공간이다. 토갑과 토실은 떡을 만들어 장터에서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하는데, 왈짜패는 민중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들로 등장한다. "용궁에서의 하루는 육지에서의 한 달"이라는 시간의 불균형 속에서 토실은 임신한 몸으로 돌당섬에 남아 토갑을 기다리며, 토갑이 용궁에 머무는 동안 육지에서는 출산과 죽음을 맞게 된다. 이훈호의 〈토끼, 날다〉는 사천 설화를 기반으로 토끼와 토실의 관계를 통해 민중의 노동과 삶, 가족 윤리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용궁이라는 절대권력의 공간을 통해 개인의 생명과 가족이 국가적·제도적 논리 속에서 어떻게 희생될 수 있는지를 설화적 판타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 이훈호 연출의 사천 용궁, 비토섬 물길로 지은 〈토끼날다〉
진주 경상대학교 연극반 출신인 이훈호 연출은 졸업 뒤 진주 극단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하기 이전에 '우리살림들소리'라는 단체에서 2년 동안 전통 연희와 소리를 배울 정도로 전통과 연희에 대한 애착이 크다. 2011년 〈바리서천 꽃그늘 아래〉(작 정가람)로 전국연극제(현 대한민국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이훈호 연출의 전통성과 연희적 형식이 잘 녹아 있는 대표작이다. 이후 〈토생전〉, 〈돌당 토깐이〉, 〈별주부 쌍코치 터졌다〉 등 토끼와 자라 이야기를 소재로 마당놀이와 전통 연희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 왔고, 1998년 창단한 극단 장자번덕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40여 편의 연출을 해오고 있다. 〈토끼날다〉 역시 〈돌당 토깐이〉의 시즌 2 개념으로 확장·개발된 작품이다. 이처럼 이훈호 연출의 감각에는 자연스럽게 전통과 연희성이 배어 있다. 〈토끼날다〉는 마당놀이적 연희성을 보여주면서도 퓨전 가무백희에 가깝다. 사물과 전통 악기 위주가 아니라 건반·기타·퍼커션 등 현대적 음악 효과를 중심으로 악사들을 활용해 극중 장면의 분위기와 등장인물들의 합창과 솔로곡을 살려냈다. 풍자와 해학성 역시 현대적인 웃음 코드로 변환했다. 무대는 물결 치는 월등도의 잔잔한 표면처럼 빈 공간(여백)을 두고, 그 위를 붉은 달 한 점이 떠 있는 동양화 한 폭 같은 이미지로 채운다. 설화적으로 의인화된 등장인물들은 동작과 움직임으로 캐릭터의 특징을 만들어가는데, 10여 명의 배우들이 살려낸 몸짓과 동작, 움직임을 앙상블로 엮어냈다.
움직임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프롤로그다. 월등도에서 살아가는 토끼 마을을 연희적 리듬과 움직임으로 그려내는 장면은 균형 감각이 좋고, 가벼운 유머와 신체성이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금실 좋은 월등도의 토끼 부부가 살아가는 플롯은 비토섬에서 떡을 팔아 살아가는 이야기, 왈짜패를 만나 폭행을 당하고 전 재산을 잃은 사건, 입덧하는 아내를 위해 월등도 섬에서 볼락을 낚시하는 장면, 낚싯줄에 딸려온 자라(임주영 분)가 "용궁에 아내가 좋아하는 사천 바다 산해진미가 많다"며 용궁으로 떠나는 길을 열어주는 대목 등으로 이어진다. 이후 용왕과 용궁 세계 이야기, 바닷속 풍경, 자라의 협조로 뗏목을 타고 탈출해 월등도로 돌아와 아내의 죽음을 확인하는 토갑, 그 뒤를 따라 죽는 토갑과 섬에 정착하는 별주부의 이야기까지 플롯은 단순하지만 정직하다. 극의 초반은 움직임과 악사들의 리듬, 군무와 독창·합창으로 극의 분위기를 연희와 연결하고, 연출의 시각적 이미지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남해 용궁이다. 남해의 특산물인 가오리, 복어 등 산해진미가 동화적으로 펼쳐진다. 무대가 가장 입체적으로 표현되고 시각적으로 형상화 되는 장면이 바로, 이훈호 연출의 재료들이 총 동원되는 극중장면은 '용궁장면'이다.
용왕의 캐릭터는 리더십이 부재한 다혈질 이미지로 설정해 웃음을 높였고, 중간중간 "인어, 인어"를 외치며 용궁 분위기를 살려내는 배우의 소리 리듬은 판소리의 추임새처럼 극중 장면에 활기를 준다. 뗏목을 타고 육지로 돌아가는 길은 웹툰적 상상력이 입혀진 장면처럼 보이고, 마지막에 토갑이가 물길을 헤치고 보름달 아래 죽은 아내 곁으로 가는 길은 서정적이고 애잔하다. 극단 장자번덕의 〈토끼날다〉의 장점은 사천의 별주부전 설화를 우화적으로 풀어내면서도 우리 전통과 현대 리듬을 자연스럽게 퓨전화했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대 이미지가 공간적으로 더 풍부하게 확장되었더라면 하는 시각적 확장성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천에 사는 토끼 부부 이야기를 기교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장점이다. 이훈호 연출은 "앞으로도 우리의 전통과 연희성이 제 작품에 더 발전적으로 양식화될 수 있도록 노력할 거고, 그런 연출을 계속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연극을 진심으로 대하는 연출가의 이 한마디 속에 장자번덕의 방향성이 농축되어 있다. 별주부전의 출생지 "경남 사천의 물길로 날아온" 극단 장자번덕의 〈토끼날다〉는 경남 사천 비토섬 설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25 문예회관 특성화 지원사업으로 사천시 지역브랜드 시리즈로 제작되었으며, 기획은 김종필 극단대표가 맡았다. 극단 장자번덕은 〈토끼, 날다〉 외에도 사천 남쪽 와룡산을 배경으로 고려 현종 이야기를 다룬 가무백희극 〈와룡, 고려를 깨우다〉를 통해 지역 소재를 레퍼토리화하고 있으며, 객석 점유율이 높고 사천 시민들의 호응도 또한 크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