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몇 달 전, '수운잡방(需雲雜方)과 음식디미방(閨壺是議方)'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보에 올랐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반도의 전통 조리 지식이 담긴 이 기록물들은 2026년 6월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음식디미방은 현존하는 최고의 한글 조리서로 평가받으며 여성도 지식의 전승에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물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오래 닫혀 있던 조선의 부엌이 유네스코를 향하고 있다.
나는 1670년경 집필되었던 그 목소리를 맛보기 위해 영양 두들마을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으로 달려갔다. "어서 오시오, 400년 전의 맛이 기다립니다" 감향주(甘香酒)와 도토리죽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떠먹는 술'이라 불리는 감향주는 깊고 고운 질감이 혀끝을 살짝 어루만졌다. 이어서 도토리죽이 입안을 매끈하게 코팅했다. 음식디미방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음 장에 이어질 조선시대 맛이 더욱 궁금해졌다.
◆꿩고기 잡채, 사라진 재료의 귀환
'꿩고기'는 400년 전에는 일상적인 재료였다. 조선시대는 농업이 생업의 근간이었기에 소고기는 쉽게 먹을 수 없는 귀한 고기였다. 소는 논과 밭을 갈아 생계를 지탱하는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산야를 오가는 꿩이 단백질 식재료로 자주 사용되었다. 잡내가 거의 없는 담백한 속살을 삶아 가늘게 찢은 꿩고기를 간장, 생강, 참기름 등으로 양념하고 각종 버섯, 도라지, 미나리, 오이, 무 등의 산나물과 채소를 더해 겹겹이 고운 향을 포갰다. 지나치게 기름지지 않은 은근한 꿩 향이 채소의 산뜻함과 만나 순식간에 산자락 한복판으로 나를 데려갔다. 장계향은 이 꿩고기를 전골과 탕에도 사용한 기록을 남겼다. 절제된 풍성함과 자연을 담아낸 지혜로운 조선의 맛이었다.
◆빈자법, 손이 만드는 노동의 맛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노란 녹두전이었다. 녹두 껍질을 벗기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음식은 무거운 맷돌을 수십 번 수백 번 돌려야 만들어지는 고운 녹두 반죽이 주재료다. 맷돌 손잡이를 잡은 손은 금세 저리고 허리에는 묵직한 통증이 내려앉는 과정을 거치는 음식이다. 기름이 살짝 스칠 만큼만 부쳐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란빛을 내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금빛에 가까운 노란색은 고된 노동의 흔적이며 여인들의 힘과 정성으로 완성된 색감이었다. 빈자법을 한입 베어 물자 녹두의 고소함 뒤로 재료 그대로의 단맛이 살짝 따라 나왔다. 재료 본연의 단정한 맛을 최우선으로 했던 장계향의 품격이 맛으로 치환되었다.
◆숭어 만두, 네 고장의 맛이 만나다
구부정한 만두 모양으로 누워있는 숭어 만두는 얇게 저민 숭어로 속 재료를 단단히 말았다. 한입 베어 물자 수묵화의 붓 결 같은 무늬를 따라 영덕의 짠바람이 입안으로 불어왔다. 그다음 한입에는 영양의 청량한 산소가 녹진하게 배어들었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 부인인 장계향의 고향은 깊은 장맛으로 유명한 안동이었다. 게다가 외가는 예천 맛질 마을이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맛을 체득하며 자랐을 것이다. 결혼 후에 산나물과 약초의 고장 영양과 해산물이 풍부한 영덕을 오가며 익힌 맛을 더해 음식디미방에 견고히 담아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영덕 물길에서 잡히는 숭어의 담백함, 내륙에서 정성껏 길러낸 채소와 곡물의 은은한 향, 그리고 장계향의 정갈한 조리법이 고루 어우러져 완성되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식재료의 결이 숭어살 속에 스며들어 숭어 만두 하나에 네 고장의 풍경이 겹겹이 펼쳐지는 듯했다. 음식디미방 속 여러 음식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숭어 만두는 여행하는 맛이 되었다.
◆수증계(水蒸鷄), 산골 아침의 맛
자작하게 밴 국물은 윤기를 머금고 닭고기 사이로 은근히 흘렀다. 한 숟가락을 들면 순한 풍미가 오랜 세월을 버텨온 흙 그릇 안에서 따스한 김이 되었다. 고요한 산골에 다가오는 아침 풍경처럼. 음식디미방에는 양념으로 고추를 사용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고추는 1614년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등장하지만 장계향이 살던 경북 영양까지는 그 매운 열기가 닿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천초(川椒), 후추, 생강 등으로 매운맛을 대신하여 재료 고유의 맛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옛사람들은 음식을 그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하나의 문학이자 철학으로 여겼다. 과한 양념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이 준 재료 그 자체로 한 그릇의 균형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산골 아침의 맑은 공기처럼 수증계는 시대를 건너온 지혜로운 맛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석류탕, 한 그릇의 미감
석류탕이라는 이름은 겹겹이 접힌 둥근 만두가 실제 석류알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투명한 국물 위로 떠오른 만두는 붉은빛과 크림빛이 섞여 작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만두 속을 살짝 찢으니 속 재료가 부드럽게 흘러나와 국물과 어우러져 슴슴한 풍미를 자아냈다. 여성만이 가진 미감, 손맛, 섬세함이 아름다운 한복 자태처럼 한 그릇 안에서 은유처럼 피어났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던 석류탕은 그 이름만큼 아름다운 음식이었다.
◆삶을 조리한 여인, 장계향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장계향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이자, 소설가 이문열(李文烈) 선생의 선대 할머니로 알려진 인물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초서, 그림, 자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녀가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명함과 감각을 지녔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성에게 학문적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고 사회적 제약이 많았던 시대에, 장계향은 자신의 재능을 허영처럼 드러내기보다 가문을 품고 일으켜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평범한 딸, 며느리, 그리고 한 집안의 주부라는 자리에서 시가와 본가 모두를 화평하게 이끌었고, 열 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냈다. 말년에는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한글로 정리해 후대에 남겼는데, 이는 음식 기록을 넘어 그녀가 몸소 실천해 온 삶의 철학을 담아낸 유산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장계향은 조선시대를 지혜롭게 살아낸 여인, 여중군자(女中君子)로 기억된다.
◆안동으로, 생활의 맛을 찾아서
영양 두들마을에서 조선시대 양반가 음식을 경험했다면, 조금 더 서민적인 맛을 만나기 위해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이 빚어낸 '생활의 맛'을 여행길에서 찾아보기 위해 음식디미방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헛제사밥, 유교문화의 맛
안동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헛제사밥이다. 실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연습 삼아 상을 차렸던 옛 풍습에서 비롯된 음식으로 한 그릇에 모아 비벼 먹으며 생겨났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도 불리는 안동 유교문화의 한 축인 제사 음식은 오랜 전통을 지키는 태도를 보여주는 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다. 입안에서 조용히 살아나는 익숙한 기억을 담은 번잡함이 없는 맛이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안동식혜. 우리가 흔히 아는 음료형 식혜와 달리 생강의 알싸함과 고추에서 오는 붉은 빛이 특징이다. 헛제사밥을 먹고 난 뒤 톡 쏘는 생강 향이 밀려오는 안동식혜는 입안을 산뜻하게 정리해 주었다.
▷맘모스제과 & 지관서가(止觀書架) - 안동의 간식 타임
1974년에 문을 연 맘모스제과는 2011년 미슐랭가이드(Michelin Guide), 블루리본 서베이(Blue Ribbon Survey) 등 다양한 매체에 소개될 만큼 유명한 곳이다. 빵 굽는 냄새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가게로 들어서서 빵을 고르던 찰나, 갓 구운 크림치즈 빵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매장 안이 은근한 설렘으로 가득 찼다. 호주에서 왔다는 자신타 록(Jacinta Louise) 씨도 여러 개를 담으며 말했다. "한국인 친구가 소개해줬어요. 안동에 올 때마다 꼭 들르는 곳이죠." 알고 보니 크림치즈 빵은 이곳의 대표 메뉴였다. 대전 성심당 튀김소보로와 경쟁해도 손색없을 만큼 부드러운 말랑함이 보였다. 따끈한 빵을 들고 웅부공원(雄府公園)으로 갔다. 벤치에 앉아 크림치즈의 달콤함을 베어 물자 가을의 평화가 한입 가득 퍼졌다. 커피를 마실 곳을 찾다가 바로 옆의 지관서가에 들어갔다. 부드러운 햇살을 창살로 받아내는 실내, 그리고 안동포로 마감된 지관서가의 은은한 책 향기가 곧장 마음을 사로잡았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선비처럼 보이는 마법 같은 곳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가을의 쌀쌀함을 녹였다.
▷안동갈비 - 좋은 재료가 만드는 실패 없는 시간
안동에는 '갈비 골목'이 있을 만큼 안동갈비가 널리 알려져 있다. 갈비를 재우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다. 마늘을 중심으로 한 양념으로 고기를 재워 화려한 맛보다 재료 본연의 힘을 믿는 철학을 이어가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숯불 위에 올려진 고기는 천천히 온기를 머금으며 한우 고유의 풍미를 그대로 드러낸다. 예전부터 안동은 소 사육이 활발했던 지역이라 질 좋은 한우를 구하기 쉬웠다. 숯불의 열기와 연기가 고기 결을 부드럽게 열어 주고, 은근한 향이 깊이를 더한다. 그렇게 완성된 한 점에는 담백함과 진한 향미가 있다. 안동갈비는 화려한 기술보다 '좋은 재료, 정직한 불, 시간'이 만드는 맛이었다.
▷버버리찰떡 - 버버리(Burberry)를 이긴 버버리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대표 버버리찰떡이 있다. 80년 전통을 지닌 찰떡으로 수십 년간 지역 주민들의 입맛을 책임져왔다. 찹쌀을 오래 불리고, 찌고, 떡메로 두들기는 과정 덕분에 기계로 만든 떡과는 비교할 수 없는 씹히는 쫄깃함이 있다. 2013년, '버버리'라는 이름을 두고 영국의 명품 브랜드 버버리와 상표권 분쟁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특허심판원은 지역 사투리 '벙어리'에서 유래한 이 상표가 혼동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전통 음식과 지역 언어가 법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은 뜻깊은 순간이었다. "영국 브랜드에서 문제를 삼았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름을 지키고 싶었어요. 안동의 이야기니까요. 쫄깃하고 달지 않아 씹을수록 자연스러운 단맛이 나는 떡. 그 맛과 이름과 역사는 우리가 지켜야 했던 이유였지요." 담담하게 말하던 주인의 눈빛에는 오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떡집을 나서며 생각했다. 세계적인 브랜드와 맞서 싸운 작은 찰떡 한 조각. 그 안에 담긴 것은 안동 사투리에 깃든 정성 어린 마음과 기억들이었다. 그래서 버버리찰떡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랐다.
◆400년 전 레시피, K-푸드를 움직이다
장계향의 조리 철학과 안동의 생활 음식 문화는 미식을 넘어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오늘의 여행자는 유명 맛집을 찾는 소비자가 아니라, 조리서가 열어 둔 세계 속에서 직접 참여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은 전통 음식과 전통주를 스스로 빚어보는 과정을 통해 그 시대의 손맛과 호흡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이는 과거를 새롭게 구성하는 여행이자 경험 마케팅이 지향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영양과 안동이 보여주듯, 지역의 음식은 여행을 독자적 콘텐츠로 확장시키고 그곳을 오래 기억하게 한다. 특히 음식디미방은 400년 전 장계향의 부엌에서 피어난 향과 온기를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려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경험은 지역을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이 되며, K-푸드 시대에 한국적 진정성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스토리텔링이 되고 있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