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미 디자이너의 세계 명품 이야기]경계를 허문 패션의 연금술사, 장 폴 고티에 (Jean Paul Gaultier)

입력 2025-10-22 1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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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고티에의 2026년 봄,여름 기성복 주니어 컬렉션
장 폴 고티에의 2026년 봄,여름 기성복 주니어 컬렉션

프랑스가 낳은 가장 도발적 천재, 장 폴 고티에는 패션을 하나의 '문화적 언어'로 바꾸었다. 그는 디자인을 통해 시대의 금기를 해체했고, 옷이라는 도구로 젠더, 정체성, 대중문화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했다.

◆장 폴 고티에, 금기를 재단한 소년의 시작

1952년 4월 24일, 프랑스 파리 남서부의 작은 마을 바뇌에서 태어난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는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어머니는 계산원으로 일했다. 그에게 진정한 예술의 세계를 열어준 이는 할머니였다. 드레스와 코르셋, 장식 핀과 향수 냄새가 가득한 방은 어린 고티에에게 첫 번째 아틀리에였다. 정식 패션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그는 마네킹 대신 인형에게 옷을 입히며 재단을 배웠고 바늘과 실은 놀잇감이고, 옷은 상상력의 캔버스였다.

유년시절 장 폴 고티에와 그의 할머니
유년시절 장 폴 고티에와 그의 할머니

열다섯 살 무렵, 그는 파리의 유명 하우스들로 자신의 스케치를 보냈고, 그 재능은 곧 피에르 가르뎅(Pierre Cardin)의 눈에 띄어 정식 학위도 없는 그는 오직 '감각' 하나로 패션계에 문을 열었다. 피에르 가르뎅과 장 파투(Jean Patou) 하우스에서 일하며 그는 옷의 구조를 배웠고 그것과 동시에, 그 구조를 해체하는 방법도 익혔으며 장폴 고티에의 초창기 여정은 기술보다 상상으로, 규범보다 자유를 표현하였다.

◆파리의 반항아, 쿠튀르의 제왕이 되다

1976년, 장 폴 고티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컬렉션을 발표했다. 초기의 쇼들은 재정난과 무관심 속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가죽 재킷에 발레리나의 튀튀 스커트를 결합하고, 깡통으로 만든 주얼리를 선보이는 등 상식을 파괴하고 위트를 겸비한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점차 '고티에 스타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일본의 카시야마(Kashiyama) 그룹과의 파트너십은 그가 재정적 안정 속에서 창의력을 마음껏 폭발시키는 분수령이 되었고, 1983년에는 첫 남성복 컬렉션을, 1985년에는 앞서 언급한 '남성용 스커트'를 발표하며 '파리의 무서운 아이(앙팡 테리블(L'Enfant Terrible)'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는 매 시즌 '쇼'의 개념을 다시 썼으며 런웨이는 서커스장이 되기도 하고, 파리의 나이트클럽이 되기도 했다.

장 폴 고티에의 2020년 1월, 50주년을 기념한 마지막 오트 쿠튀르 쇼
장 폴 고티에의 2020년 1월, 50주년을 기념한 마지막 오트 쿠튀르 쇼

1997년,그는 기성복 디자이너로서는 이례적으로 오트 쿠튀르 라인을 론칭하였고, 2003년, 장 폴 고티에는 프랑스 럭셔리의 상징 에르메스(Hermès)의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자유분방한 반항아와 고고한 장인정신의 만남은 다소 모순적으로 보였지만, 그는 에르메스의 핵심인 가죽과 실크를 고티에 특유의 관능과 유머로 재해석했다.

그 결과, 브랜드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고 그는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속도와 대량 생산에 치우친 현대 패션 산업 속에서 고티에는 점차 회의를 느꼈으며, 2014년, 그는 기성복 라인의 중단을 선언하며 오트 쿠튀르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패션은 더 이상 '유행의 속도전'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예술이라는 그의 신념이었다. 2020년 1월, 50주년을 기념한 마지막 오트 쿠튀르 쇼에서 그는 화려한 은퇴를 맞았다. 200여 명의 모델이 무대를 채운 그날, 런웨이는 단순한 쇼가 아니라 그의 철학이 응축된 패션의 축제였다.

◆시대를 정의한 아이콘들

그는 디자인을 통해 시대의 금기를 해체했고, 옷이라는 도구로 젠더, 정체성, 대중문화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했다. 그의 대표적 업적들은 단순한 트렌드의 산물이 아니라, 패션사에 남은 혁명적 아이콘들이다.

원뿔 형태의
원뿔 형태의 '콘 브라' 코르셋을 착용한 마돈나와 디자인 장 폴 고티에

▷콘 브라, 억압에서 해방으로

고티에는 1990년, 마돈나의 '블론드 앰비션' 월드 투어 무대 위에 등장한 마돈나를 위해 뾰족한 원뿔 형태의 '콘 브라' 의상은 20세기 패션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된다. 19세기 여성의 몸을 억압하던 코르셋을 그는 '권력의 갑옷'으로 변주했으며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몸을 통제하던 장치가, 그의 손에서 자기 주체적 욕망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고티에는 이 한 벌의 옷으로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패션을 하나의 대화로 묶었으며 그는 "옷은 사람을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패션의 사회적 의미를 완전히 재정의했다.

스커트를 즐겨 착용한 장 폴 고티에
스커트를 즐겨 착용한 장 폴 고티에

▷남성 스커트, 젠더를 넘는 옷, 자유의 선언

1984년, 장 폴 고티에는 컬렉션 앤드 갓 크리에이티드 맨(And God Created Man)에서 남성에게 스커트를 입혔다. 단 한 벌의 의상이 패션계는 물론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고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스커트는 여성의 옷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적 유산이다."

고티에는 로마의 토가, 일본의 하카마, 스코틀랜드의 킬트 등에서 영감을 받아 '남성복의 원형'을 현대적으로 부활시켰다. 그가 만든 스커트는 단순한 파격이 아니라, '남성다움'이라는 개념에 대한 철학적 실험이었다. 고티에는 옷의 형태를 바꾸는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패션의 구조, 나아가 사회의 상징 체계를 다시 짜며, 패션이 곧 문화이자 사유의 장임을 증명했다. 그날 런웨이에서 스커트는 단순히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의 상징이자, 시대의 금기를 해체한 선언문이었다.

장 폴 고티에의 마린 룩
장 폴 고티에의 마린 룩

▷마린 스트라이프, 프랑스적 아이콘의 재창조

하얀 바탕에 네이비 스트라이프. 단순해 보이지만, 장 폴 고티에의 마린 룩은 프랑스 패션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그에게 스트라이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정체성과 자유의 은유였다. 어릴 적 바다를 동경했던 그는 선원의 유니폼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고급 패션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단순한 차용이 아니었다.

그는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코르셋과 결합시키거나, 드레스와 레더 자켓 위에 겹쳐 입히는 등 기존 미학을 비틀며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냈다. 마린 스트라이프는 곧 "고티에 스타일"의 시그니처가 되었고, 이후 향수 르말(Le Male)의 보틀 디자인에도 적용되며 그의 아이덴티티를 시각적으로 확립했다.

장 폴 고티에의 향수
장 폴 고티에의 향수

▷향으로 완성된 패션 철학, 향수 '클라시크' & '르 말'

1993년, 장 폴 고티에는 자신의 첫 향수 '클라시크(Classique)'를 선보였다. 여성의 몸통을 본뜬 보틀은 그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몸과 욕망의 상징'을 가장 아름답게 시각화한 작품이었다. 2년 뒤 출시된 '르 말(Le Male)'은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남성의 근육질 실루엣을 형상화하며 대조적인 매력을 드러냈다. 이 두 향수는 단숨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패션을 향으로 확장한 고티에의 예술적 감각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두 향수의 보틀 디자인은 당시 향수 업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패키징 또한 깡통 모양으로 디자인되어 독특함을 더했다.

'르 말'은 조향계의 슈퍼스타인 프란시스 커정(Francis Kurkdjian)이 불과 26세의 나이에 만들어낸 첫 번째 대히트작으로 그는 이후 '메종 프란시스 커정'을 설립해 '바카라 루쥬 540' 같은 걸작을 만들었다. 현재는 디올 퍼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장 폴 고티에의 게스트 디자이너 컬렉션. 사카이, 하이더아커만, 시몬로사, 루도빅 드 생 세르냉 (왼쪽부터)
장 폴 고티에의 게스트 디자이너 컬렉션. 사카이, 하이더아커만, 시몬로사, 루도빅 드 생 세르냉 (왼쪽부터)

◆해방의 미학, 장 폴 고티에를 기억하다

장 폴 고티에의 은퇴 이후, 그의 하우스는 매 시즌 다른 디자이너가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는 독창적인 '게스트 디자이너' 시스템(사카이의 아베 치토세, Y/Project의 글렌 마틴스, 하이더 아커만, 루도빅 드 생 세르냉 등)을 도입했다. 이는 고티에의 '정신'이 특정 디자이너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창의적인 목소리를 통해 계속해서 진화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그의 개방적 철학을 반영한다.

장 폴 고티에는 패션이 단순한 옷이 아니라 '태도'이자 '즐거움'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금기를 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다름을 포용했으며, 세상의 모든 '비주류'에게 '당신도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패션계의 이단아였고, 반항아였으며, 가장 위대한 거장이었다. 고티에가 디자인한 것은 옷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이며 그의 유산은 박물관의 마네킹이 아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표현의 자유'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패션의 역사는 장 폴 고티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 폴 고티에의 뮤즈 블랙핑크 제니
장 폴 고티에의 뮤즈 블랙핑크 제니

◆장 폴 고티에가 선택한 뮤즈, 제니

블랙핑크의 제니가 장 폴 고티에의 뮤즈'가 되었다.새롭게 공개된 장 폴 고티에 2025 프리폴 캠페인에 제니가 등장했다. 이번 캠페인은 장 폴 고티에의 꾸뛰르와 레디 투 웨어를 총괄할 디자이너 듀란 랜팅크의 컬렉션 데뷔를 앞두고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제니는 더블 데님 앙상블을 비롯해 고티에의 타투 프린트가 돋보이는 뉴트럴 드레스까지, 다양한 아이템을 현대적으로 선보였다.

박연미 디자이너 명장,디모먼트 디자이너
박연미 디자이너 명장,디모먼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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