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티첼리, 카라바조, 베르니니를 중심으로
박미영 시인
1459년 피렌체의 최고 부호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개설해 정기 학술 토론회를 열기 시작했다. 피렌체 시민들과 오스만 튀르크에 쫓겨 대거 이주해온 콘스탄티노플 철학자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인문 예술의 장(場)을 펼쳐 준 것이었다.
고전 수집광이기도 했던 그는 메디치은행 16개 지점을 통하거나 필사가들을 보내 유럽 근동의 희귀본과 귀중본을 대거 수집해 도서관도 설립했다. 꽃의 도시 피렌체는 신플라톤주의와 고전 읽기 열풍에 휩싸여 활짝 꽃피웠다.
15세 소년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작은 술통'을 뜻함)도 그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경도돼있었다. 금세공사 훈련을 받길 원하던 아버지를 막 설득해 화가 필리포 리피의 제자가 된 참이었다. 천재적 직관을 가졌던 소년은 선 원근법과 소실점, 명암, 입체감 등을 회화에 도입한 마사초 등을 연구해 25세 무렵엔 메디치가의 끊임없는 작품 의뢰는 물론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부름을 받아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도 그리는 실력자가 된다. 운명의 뮤즈 시모네타(Simonetta Vespucci·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친척)를 만나 첫눈에 반한 것도 그때였다.
"나는 아름답고 정숙한 아프로디테를 노래하려네. 황금 수관을 머리에 쓰고 바다로 둘러싸인 키프로스 성을 지배하는 신을, 여신은 서풍 제피로스의 부푼 입김에 떠밀려 물살 거친 파도에 실려서 부드러운 거품을 타고 왔다네. 황금 머리띠를 두른 계절의 여신들이 아프로디테를 기쁘게 맞이하며 그녀의 몸을 신성한 의복으로 감싸고 신성한 이마 위에 황금 관을 씌워 드렸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후원하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연인이었고 결핵으로 22살에 죽고 말았다. 보티첼리는 조개껍데기 위에 서 있는 '비너스의 탄생(Birth of Venus)'과 '봄(Primavera)', '비너스와 마르스' 그림 속 여신의 얼굴에 그녀를 그려 넣었다. 베누스 푸티카(venus pudica·손과 머리칼로 벗은 몸을 가리는 정숙한 비너스) 자세로 그리며 그녀을 애도하며 1510년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순애보였다. '동방박사의 경배'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다섯째 날 이야기)' 연작 등으로 초기 르네상스 예술의 상징이 돼 지금도 추앙받고 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는 1571년 밀라노에서 카라바조 후작의 집사 겸 건축가인 메리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고아가 된 후 밀라노의 페테르차노의 도제로 들어가게 된 카라바조(본명이 미켈란젤로여서 이때 개명했다)는 천성적으로 반항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카라치가, 마사초, 조토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수한 주제들로 사실적 표현을 강화하던 초기에서 점점 현실과 진실을 우선시해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전통을 경멸하고 거리에서 소재를 취해 빛을 사용한 강렬한 명암 대비(Chiaroscuro)와 극사실주의로 그림을 그렸다.
1597년 콘타렐리 예배당의 장식을 의뢰받아 그린 '성 마태오의 소명', '성 마태오와 천사', '성 마태오의 순교'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켜 순식간에 당대 모든 화가들을 뛰어넘어버렸다.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으로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공직자들의 지탄을 받았지만 그의 성공은 굳건했다. '바쿠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메두사', '카드 사기꾼' 등 현재 보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개인과 교회 모두 그에게 많은 그림을 주문했고 절망적일 정도로 가난했던 방랑생활이 끝나고 추기경과 왕자들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그는 여전히 타고난 성급하고 방탕한 성격을 버리지 못했다. 술과 싸움으로 인한 폭행, 체포, 위법 행위 등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다가 결국 살인죄로 도망자 신세가 되어 로마,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 등지를 전전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그는 머무는 곳마다 걸작을 그렸다. '세례 요한의 참수', '성녀 루치아의 매장' 등 심지어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뛰어난 구도의 작품들도 몇 점 있다. 마지막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젊었을 때 자신의 얼굴을 한 다윗이 자신의 얼굴을 한 목이 잘린 골리앗을 한 손에 들고 있다. 이를 자신을 자책하면서 벗어나고 싶다는 회한과 염원의 표현이라 혹자들은 해석하기도 한다. 1610년, 이 그림을 들고 교황의 사면을 기대하고 로마로 향하던 카라바조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카라바조주의(Caravaggism)'. 현대 연극이나 드라마의 무대처럼 검은 배경에 그가 빛을 사용한 것을 원근법을 발견한 것과 같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가 없었다면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베르메르는 물론 리베라, 조르즈 드 라 투르, 들라크루아, 쿠르베, 마네의 그림도 완전히 달라졌을 거라 말하는 미술사학자도 있다. 백 번 동감한다. 이탈리아 화폐엔 카바라조의 얼굴과 그가 그린 과일 정물이 앞뒤에 새겨져 있다. 베르니니도 화폐의 인물이다.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는 1598년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조각가였던 아버지 피에트로가 일찌감치 아들을 수련시켰다. 아버지를 훨씬 능가하는 독보적 실력으로 평생 바오로 5세를 비롯한 8명 교황들의 총애를 받아 어릴 적부터 바티칸의 작품들을 접하는 특혜를 누렸다. 그것이 그의 천재를 촉발해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사후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바로크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조각가이면서 건축가, 화가, 극작가이기도 한 그는 교황 우르바노 8세(베르니니가 그린 그의 초상화도 유명하다)의 수석 미술관으로 전 생애에 걸쳐 성 베드로대성당 광장의 타원형 회랑, 성당 내부 제대 위에 있는 대형 청동 닫집인 나선형 기둥과 금장 장식으로 대표되는 바로크 양식의 절정 발다키노(Baldacchino), 코르나로 예배당, 알티에리 예배당과 팔리초 바르베리니, 스칼라 레지아 계단 설계, 트레비 등 여러 분수 디자인 등 수많은 건축과 설계, 디자인을 남겼다.
그 중에서 특히 로마 보르게세미술관의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신하는 극적인 순간을 섬세한 표현과 생동감 넘치는 동세로 묘사해낸 '아폴로와 다프네', 기존의 정적인 다윗상과는 달리 물매를 던지기 직전의 역동적인 순간을 포착한 '다윗', 하데스의 거친 손가락에 눌러진 자국이 생생한 '페르세포네의 납치' 조각상은 그야말로 관객의 숨을 멎게 할 정도다.
베드로대성당의 '성 롱기누스상(Saint Longinus)'과 프랑스로 초청되어 가 제작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흉상' 또한 바로크예술의 정점으로 일컬어진다. 1680년 그가 사망하자 이탈리아 조각의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말이 떠돌았다. 실제로 이탈리아가 유럽 미술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 시기도 끝장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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