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 기자의 한 페이지]진병길 신라문화원장 "문화유산, 활용이 곧 보존"

입력 2025-05-14 10:24:54 수정 2025-05-14 16:02:45

경주 서악마을 '명소'로 탈바꿈…문화유산 활용해 지역 활성화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이 지난해 펴낸 책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이 지난해 펴낸 책 '서악마을 이야기'를 들고 서악동 삼층석탑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경북 경주엔 서악마을이란 작은 동네가 있다. 15년 전만 하더라도 삼국통일을 이룬 태종무열왕 무덤이 마을 입구에 있어 '무열왕릉 동네'로 불리던, 평범한 시골마을이었다.

진병길 신라문화원 원장은 2010년 이 마을에 주목했다. 그는 마을 안쪽 서악동 삼층석탑과 선도산 고분군 주변에 방치된 쓰레기를 치우고 유적을 가렸던 잡목을 베어낸 뒤 그곳에 구절초 등을 심고 탐방로를 조성했다. 폐 축사를 리모델링해 문화공간을 만들고, 골목길 따라 어지럽게 하늘을 가로지르던 전선 일부를 땅속에 묻었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꿈속에서 소변을 보면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깃든 보희 연못은 바닥을 준설하고 연꽃이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런 노력 끝에 서악마을은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 거주하러 들어오는 주민이 하나 둘 늘고, 전에 없던 카페도 최근 2년 새 3곳이나 생길 정도로 활기 넘치는 마을이 됐다. 특히 구절초가 피어나는 10월이 되면 주말 하루 평균 3천여명이 마을을 찾아 꽃밭과 음악회를 즐긴다. 이런 이유로 진병길 원장은 국내 문화재 보존·활용 단체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꼽힌다. 지난 12일 경주 서악마을에서 만난 그는 "문화재를 잘 활용하는 게 가장 좋은 보존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서악마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대학생(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사학과) 때부터 경주의 문화유산을 시대에 맞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데 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를 계기로 1993년 비영리 문화단체인 신라문화원을 설립하게 됐고 오랜 기간 경주 문화유산 보존과 교육 활동 등을 해왔다. 2010년 신라문화원 활동을 눈여겨본 경주향교 전교로부터 이 마을에 있는 서악서원을 고택 숙박시설로 운영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들어온 게 인연이 됐고, 마을을 눈여겨보게 된 계기가 됐다.

서악동 삼층석탑 주변 정비 전 모습. 신라문화원 제공
서악동 삼층석탑 주변 정비 전 모습. 신라문화원 제공

-당시 서악마을은 어떤 모습이었나.

▶서악마을엔 태종무열왕릉과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서악동 귀부(보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선도산 고분군,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등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하지만 외지 사람들은 마을 입구 무열왕릉 정도만 다녀갈 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특히 서악동 삼층석탑과 고분군 주변은 잡목이 우거져 시야를 가렸고 접근을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방치된 생활쓰레기가 곳곳에 널려있어 보기에 흉할 정도였다.

2010년은 정부의 '문화재 돌봄 사업'이 갓 걸음마를 떼던 시기였다. 그해 문화재청(지금의 국가유산청)은 전국 5개 권역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시작했고 신라문화원은 경북남부문화재돌봄센터를 수탁 받아 운영하게 됐다. 이듬해 서악동 삼층석탑 일대를 돌봄 대상 문화유산으로 선정한 뒤 수년 동안 사업을 진행했다.

방치돼 있던 닭장을 치우고 곳곳에 볼품없이 산재한 잡목을 걷어낸 뒤 구절초와 작약을 심고 탐방로를 만들었다. 삼층석탑 주변 10평(33㎡) 남짓했던 문화재 영역이 1천평(3천300㎡)로 늘면서 사진촬영 명소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문화재와 주변 경관이 하나의 관광자원이 된 것이다.

서악동 삼층석탑 정비 후 모습. 신라문화원 제공
서악동 삼층석탑 정비 후 모습. 신라문화원 제공

-유적지 주변뿐만 아니라 마을까지 정비했다.

▶KT&G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 2016년이 끝나갈 즈음 문화재 주변 환경은 어느 정도 정비됐지만 마을 환경 정비는 여전히 고민거리였다. 이에 신라문화원은 KT&G의 사회공헌 사업인 상상펀드 공모사업에 기획안을 제출했고 2년간 2억9천여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흉물처럼 방치된 폐건물을 철거하고, 30여 가구의 푸른 패널지붕을 검은색 페인트로 칠해 기와지붕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이와 함께 담장 낮추기, 돌담 쌓기, 흰벽 페인트 작업, 전선 지중화 등 다양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진행했다. 올해부터는 신협중앙회가 지역특화사업의 일환으로 전선 등 케이블 지중화 사업을 지원한다.

사적(私的) 생활구역을 정비하는 사업이었던 만큼 마을 주민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주민들은 마을 가꾸기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 외에도 신라문화원이 매년 가을 여는 구절초음악회 등 마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결국 서악마을의 변화는 어느 한 주체의 단독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민간(신라문화원)이 주도하고, 공공(국가유산청·경상북도·경주시)이 지원하며, 기업과 지역 주민이 함께 힘을 모아 만들어 낸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문화유산청도 서악마을 사례를 '국가유산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모범사례'로 높이 평가했다.

▶지난 2019년 정부 주최로 '제1회 대한민국 정부 혁신박람회'가 열렸다. 행정안전부 및 중앙행정기관·지자체·공공기관·지방공기업 등 80개 기관이 참여해 59개의 혁신정책 과제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당시 문화재청은 이 행사에 민·관·기업이 협력해 문화유산을 정비하고 관광마을로 탈바꿈한 서악마을 사례를 내놨다.

사례 공모 형식이 아닌, 문화재청이 직접 선정했을 정도로 서악마을 사례는 큰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2월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의 초청으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 서악마을 사례를 중심으로 한 문화재 보존과 활용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이 지난해 펴낸 책
진병길 신라문화원장이 지난해 펴낸 책 '서악마을 이야기'를 들고 서악마을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신라문화원은 서악마을 사례 외에도 30여 년간 이어온 '신라달빛기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문화원 설립 이듬해인 1994년 만든 야간 탐방 프로그램이다. 보름달이 환히 뜨는 밤에 경주 남산 자락에 흩어져 있는 석불을 보러 다녔다. 2003년 즈음해 달빛기행은 경주 시내로 내려왔다. 분황사·불국사·서악서원·첨성대 등에서 행사를 치렀다. 해가 지면 경주 관광도 끝나던 시절이었다. 야경 명소가 된 동궁과 월지, 첨성대에 조명을 밝힌 것도 그로부터 2, 3년쯤 뒤였다.

지금은 전국 곳곳에서 달빛기행이란 이름으로 야간 투어를 진행하지만, 사실 달빛기행이란 명칭의 원조는 신라달빛기행이다. 신라문화원은 2005년 달빛기행 상표권을 등록했는데 2007년 문화재청에서 연락이 왔다. '창덕궁 달빛기행'을 준비 중인데, 사용료를 지불할 테니 달빛기행 이름을 쓸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문화재 활용이라는 문화재청의 뜻을 존중해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지난 11일에는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해 첫 신라달빛기행이 열렸다. 10월까지 총 4차례 열릴 예정이다. 사실 코로나 사태 전까지만 해도 신라달빛기행엔 해마다 6천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했다. 거의 매달 행사가 열렸고 규모도 지금보다 훨씬 컸다.

-신라달빛기행이나 서악마을 사례에서 '문화재 활용이 곧 보존'이라는 평소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경주의 여러 마을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다양한 종류의 규제에 묶여 있다. 문화재를 잘 보존하자는 취지지만, 주민 입장에선 불편을 초래하는 결과로 다가오기 십상이다. 서악마을을 통해 문화재로 피해보는 마을이 아니라, 문화재로 인해 혜택을 누리는 마을을 만들고자 했다.

문화유산을 잘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게 가장 좋은 보존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소신을 갖고 많은 노력을 했다. 서악마을 사례가 유일한 해법이거나 최선의 대안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례가 문화유산과 주민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는데 유익한 시사점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