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정성 들인 손글씨, 언제 마지막으로 써봤나요?

입력 2025-05-02 06:30:00

필사 책·아이템 등 인기…'손글씨 열풍'
"디지털 피로감 해소하고 집중력 높여"
글씨 교정 받거나 캘리그라피로 발전하기도
교보손글씨대회 작년 참가자 4만5천명 기록

어릴 적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들. 그 때는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예쁜 글씨를 정성 들여 썼더랬다.
어릴 적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들. 그 때는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예쁜 글씨를 정성 들여 썼더랬다.

봄을 맞아 집 대청소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잡동사니를 처박아 둔 서랍장을 활짝 열어 하나둘 꺼내다가 눈에 들어온 것은 어릴 적 친구들과 주고 받은 편지 더미! "연정아, 이 편지지 예쁘지? 학교 앞 문구점에서 샀어.", "나는 ㅇㅇ중학교에 가고 싶은데 못 가면 어떻게 하지?", "요즘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 재밌더라. 너도 들어봐."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편지지는 온갖 사소한 얘기과 꿈이 펼쳐지는, 진심이 담긴 매개체였구나. 꼭꼭 눌러 쓴 글씨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 정성 들여 글씨를 써본 게 언제였지?

◆일부러 찾는 '느림'

나만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닌가 보다.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마우스로 클릭하는데 익숙해진 손가락에 다시 펜을 쥐는 사람들이 늘고 있단다.

손글씨 열풍은 '필사 책'의 인기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는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베스트셀러 10위권 안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고 ▷더 나은 어휘를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어른의 품격을 채우는 100일 필사 노트 ▷2500년 동안 사랑 받은 초역 부처의 말 필사집 등도 인기 도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 책들은 한쪽 면은 토막 글들을, 한쪽 면은 직접 펜으로 쓸 수 있도록 비워 놓은 것이 특징이다. 별도의 노트를 마련하지 않아도 바로 필사할 수 있도록 한 것. 이 같은 인기에, 서점에서는 필사 책들을 따로 모아 놓은 매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노랫말, 명시, 속담 등 다양한 필사책이 인기다. 영풍문고 홈페이지 캡처.
노랫말, 명시, 속담 등 다양한 필사책이 인기다. 영풍문고 홈페이지 캡처.
교보문고 대구점은 필사책을 모아 놓은 매대를 마련해뒀다.
교보문고 대구점은 필사책을 모아 놓은 매대를 마련해뒀다.

책만 많이 팔리는 게 아니다. 필사도 '장비발'이다. 최근 각광 받는 필사템 중 하나는 책 누르개, 문진이다. 책을 펼친 모양의 아크릴 투명 문진은 글씨를 가리거나 왜곡시키지 않으면서 책장이 넘어가지 않게 고정해줘, 핫한 필사템으로 떠오르고 있다. 내부에 그림이나 꽃을 넣은 투명한 반구형 문진, 곰돌이 모양의 오브제 문진, 집게형 문진 등 다양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의 문진들도 인기다.

필사하고 싶은 구절을 표시하는 '책연필', '롱인덱스'도 있다. 책연필은 독서용 색연필로, 일반적인 색연필과 달리 색이 진하지 않고 비교적 투명해, 밑줄 긋는데 최적화한 것이 특징이다. 롱인덱스는 줄을 긋는 대신 문장 위에 붙이는 얇고 긴 스티커다. 이외에 필사하기에 좋게 구성된 노트와 부드럽게 써지는 펜 등도 인기 필사템으로 꼽힌다.

"종일 컴퓨터 앞에서 일하거나, 릴스와 쇼츠로 인해 도파민에 절여진(?) 날에는 더욱 필사가 간절해져요. 천천히 글씨를 적어나가는 것, 디지털 피로감을 줄이는 데 그만한 게 없어요."(직장인 A씨)

이처럼 누군가는 디지털 디톡스를 위해, 아날로그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혹은 빠른 세상의 변화 속 일부러 느림의 미학을 즐기기 위해, 몰입의 성취감을 한껏 즐기기 위해 오늘도 펜을 들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글씨를 옮겨 쓰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인 곽 모씨는 칠판 판서를 잘 하고 싶어서
초등학교 교사인 곽 모씨는 칠판 판서를 잘 하고 싶어서 '글씨 교정 워크북'을 사서 연습했다. 곽 씨 제공
직장인 A씨는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직장인 A씨는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캘리그라피'에 푹 빠졌다. 글씨를 써서 블로그에 올려, 손글씨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기도 한다. 사진은 네이버 블로그 '라이프로그캐리뷰'에 올린 A씨의 글씨.

◆이왕 쓰려면 제대로, 예쁘게

이왕 글씨 쓰는 것, 좀 더 잘 쓰고 싶은 이들의 노력도 빛난다. 글씨를 잘 쓰기 위해 글씨 교정 교본이나 연필 교정기를 구매하기도 한다. 유튜브에도 '예쁜 글씨 쓰는 방법' 강의 영상이 최대 수백만회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인기다.

초등학교 교사인 곽 모씨(28)는 "칠판 판서를 잘 하고 싶어서 방학 동안 '글씨 교정 워크북'을 사서 연습했다"며 "몸에 밴 글씨 습관을 고치려 한 자, 한 자 의식하며 적으니 나중에는 손이 아파서 덜덜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히 글씨 교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직장인 B씨(33)는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캘리그라피'에 푹 빠졌다. 대학생 때 유튜브에서 영문 캘리그라피 쓰는 영상을 우연히 본 뒤 문구점에서 캘리그라피 책과 펜을 사서 필기체를 연습한 것이 시작이었다.

"자연스럽게 악필이 교정되니 가끔 글씨를 쓸 일이 생기면 소소한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고, 글을 쓰며 집중도가 높아져 생각도 깊게 할 수 있게 돼 좋아요. 쓸 만한 좋은 문장을 찾으면서 문장들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하죠."

예쁘고 개성 있게 쓴 글씨들을 그는 블로그에 업로드한다. 벌써 10년 째. 단순히 글씨를 쓰는 것을 넘어, 최근에는 손그림을 더해 일기를 쓰기도 한다. 그는 "앞으로 수묵화를 배워서 그림과 함께 글귀를 적는 등 내 손으로 펼칠 수 있는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교보문고 대구점에 비치된 교보손글씨대회 응모용지와 응모함.
교보문고 대구점에 비치된 교보손글씨대회 응모용지와 응모함.
오랜만에
오랜만에 '각 잡고' 글씨를 쓰려니 손이 덜덜 떨렸다. 5분 간의, 짧지만 강한 몰입을 겪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교보손글씨대회' 도전해보다

"손으로 한 줄, 마음을 적다."

올해로 11회를 맞은 '교보손글씨대회'의 슬로건이다. 손글쓰기문화확산위원회가 주관하고 교보문고 등이 주최하는 이 대회의 누적 참가자 수는 11만2천여 명에 달한다. 특히 지난해에는 약 4만5천명이 참여해 전년에 세운 역대 최다 참가자 수(1만4천700명)의 3배로 기록을 경신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해진 일상 속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여유를 되찾자는 대회 취지에 고개를 끄덕이던 주말앤 팀은 마침 교보손글씨대회 예선 접수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지난 25일 비장하게 교보문고 대구점에 들어선 세 명의 기자. 2층에 비치된 손글씨대회 응모용지와 응모함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각자 쓰고 싶은 책의 구절을 찾은 뒤 서점 내 카페에 앉았다.

응모용지를 펼치자 한 면은 응모자 정보를, 한 면은 예선용 글씨를 쓸 수 있게 비워져 있었다. 이름과 도서명, 문장 선정 사유부터 써내려가는데 왜 벌써부터 손이 떨리는지.

다시 차분히 마음을 가라 앉히고 본격적으로 책 속의 한 구절을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 두드리는데 익숙해졌는지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새 글씨 쓰는 근육이 퇴화했나.

아 참, 기자면 평소 취재할 때 종이와 펜이 필수 아니냐, 매일 글씨를 쓰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감히 이렇게 말하겠다. 요즘은 스마트폰 녹음 기능과 텍스트 변환 앱이 필수라고. 그리고 취재수첩 속 급하게 휘갈겨 쓴 지렁이 같은 글씨는 나도 못 알아볼 때가 많다고.

왼쪽은 기자가 평소 취재할 때 휘갈겨 쓰는 글씨, 오른쪽은 손글씨대회를 위해 연습한 글씨. 다른 인격체인가 싶을 정도다.
왼쪽은 기자가 평소 취재할 때 휘갈겨 쓰는 글씨, 오른쪽은 손글씨대회를 위해 연습한 글씨. 다른 인격체인가 싶을 정도다.

아무튼 한 글자씩 정성을 담아 쓰다보니 잡념은 없어지고 글씨와 나만 남았다. 문장을 다 쓴 뒤 고개를 드는 순간, 오랜만에 한 가지에 집중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요즘은 책을 읽을 때도 서너장에 한 번 스마트폰을 들여다볼 정도로 정신이 산만한데, 이게 얼마만의 느껴보는 몰입의 기쁨인가.

두 가지의 다른 글씨체를 적어 응모함에 넣었다. 주말앤팀 기자들 모두, 잠깐이지만 정성 들여 글씨를 적는 경험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선배, 손글씨는 왠지 모르게 나 자신을 꾸밈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거울 같아요."

오늘 저녁, 깨끗한 종이 한 장과 펜을 준비해보자. 평소 좋아하는 책 속 문장이든, 가족이나 친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든, 내일 해야 할 일이든 뭐든 좋다. 내 손으로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는 순간 디지털에 밀려 잊고 있었던 특별한 감정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