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백강의 한국 고대사] 경연(經筵) 제도 부활로 대통령 중심제 결함 보완

입력 2025-03-25 04:30:00

수업하는 학생의 삶 영위한 조선의 왕들

조선전기 제왕학 지침서였던 진덕수의 대학연의.
조선전기 제왕학 지침서였던 진덕수의 대학연의.
경연에서 제왕학 교재로 사용했던 정관정요.
경연에서 제왕학 교재로 사용했던 정관정요.
조선중기의 제왕학 교과서였던 율곡의 성학집요.
조선중기의 제왕학 교과서였던 율곡의 성학집요.
세종 2년에는 고정적인 강의 전담기구인 경연청(經筵廳)을 설치했다.
세종 2년에는 고정적인 강의 전담기구인 경연청(經筵廳)을 설치했다.
성종 때는 특진관 제도를 마련했다.
성종 때는 특진관 제도를 마련했다.

◆제왕학 교육을 체계적으로 만든 경연제도

'대학'(大學)이란 책은 원래 고대 제왕들의 제왕학 수업을 위한 필수 교제였다. 송대에 주희가 이를 공자의 저서로 규정하여 사서(四書)에 포함시켜 유학자의 기본 교재가 되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가 '대학'에서 강조하는 기본 요지인데 그 결론은 "천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수신으로써 근본을 삼는다.(自天子 而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이다.

'대학'에서 말한 수신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자기 완성'(修己)이다. 이 완성된 인격을 확대 보편화시키는 것이 '제가, 치국, 평천하'(治人)이다.

'대학'이 제시하는 수신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무엇인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이다.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격물, 치지는 지식과 지혜의 극대화이다. 성의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毋自欺), 남이 보고 듣지 않는 곳에서도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다(愼獨). 정심은 마음이 언제나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고 중립적인 공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말한 수신은 간단히 요약하면 인간이 지식과 지혜를 겸비하고 언행이 일치하는 고매한 인격을 갖추는 것을 가리킨다.

고대의 제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천하 통치의 권력을 소유했다. 그러나 모든 제왕이 태어나면서부터 천하 통치의 인격과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후천적인 부단한 학습과 피나는 수련, 즉 수신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인격이 도야되고 능력은 향상된다.

만백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제왕에게 있어 수신은 일반 백성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여기서 제왕학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경연제도가 출현하게 되었다.

왕이 될 사람이나 또는 왕이 된 사람에게 제왕학을 훈련시키고 학습시키는 경연제도는 법치를 존중하는 서구사회에는 이런 제도가 없었다. 인치를 중시하는 동양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교육제도이다.

◆중국의 경연제도는 몹시 허술했다

제왕의 어전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한 경우는 한, 당이래 흔히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이 경연이란 이름 아래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송나라 때부터이다.

경연제도는 송대에 이르러 고정적인 강관이 설치되고 수강일정, 수강과목 등이 정해졌으며 또한 경연을 위한 전속의식이 행해졌다. 임금의 덕성을 함양하고(養君德), 임금의 마음을 공정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正君心), 학습의 교재는 유가의 경전과 역사 서적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 원나라, 금나라시대를 거치면서 경연제도는 크게 진전이 없었다. 뒤에 명나라 장거정(張居正·1525~1582)이 경연의 개혁작업에 착수하여 1년을 두 분기로 나누어 상반기에 춘강(春講), 하반기에 추강(秋講)을 하되 춘강은 2월에 시작하고 추강은 8월에 시작하며 매학기마다 기간은 3개월로 정하였다. 매월 2일, 12일, 22일 3차에 걸쳐서 강의를 진행하고 강의 장소는 문화전(文華殿)에서 하도록 규정하였다. 경연 개최시에는 조정의 중신들은 거의 전원 참가하였다.

황제를 고대의 성제(聖帝) 명왕(明王)처럼 훌륭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경연제도의 핵심이지만 일정한 정도상에서 황제의 권한을 제약하는 의미도 수반되었다.

따라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기를 바라는 제왕들에게는 경연제도가 그다지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중국 역대왕조에서 경연제도가 적극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허술하게 운영되어온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경연제도의 정착을 통한 조선왕의 체계적인 제왕학 수업

중국과 달리 우리 나라에서는 경연제도가 크게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 직관고(職官考)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인종 때 유신들과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최초로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했고 충목왕 때 서연관(書筵官)을 설치했다. 공양왕 때 서연을 경연이라 명칭을 바꾸고 영경연사, 지경연사. 강독관 등을 배치했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 경연제도의 공식적인 출범이다.

다음의 기록은 고려 때 경연을 설치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공양왕 2년에 경연관을 설치하고 심덕부를 영경연사로, 정몽주, 정도전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왕이 '정관정요'를 보고자하여 정몽주에게 그 서문을 읽도록 명했다. 강독관 윤소종(尹紹宗)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중흥함에 있어 마땅히 2제, 3왕을 본보기로 삼아야 하며 당태종은 족히 취할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어서 제왕의 정치를 천명하소서'하니, 왕이 '그렇게 여겼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2제, 3왕, 즉 요제, 순제, 우왕, 탕왕, 문왕 무왕과 같은 성군을 만들려는 것이 고려때 경연을 설치한 목적임과 아울러 심덕부, 정몽주, 정도전 같은 당대 최고의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인물들이 경연관에 참여한 것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의 개국과 함께 태조 이성계는 경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연관에 영사 1명, 지사 2명, 동지사 2명, 참찬관 5명, 강독관 4명, 검토관 2명, 부검토관 2명을 배정하여 고려에 비해 경연의 인적자원을 대폭 강화시켰다.

세종 2년에는 경연청(經筵廳)을 설치했다. 이는 고정적인 강의 전담기구를 마련한 것으로서 세종 때 경연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전문 정부기구를 출범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은 영사를 3명, 지사를 3명, 참찬관을 7명으로 늘리고 기타 시강관, 시독관, 검토관 등 하위 직급도 대폭 확대 보강하였다. 다만 이들 경연관은 실력 있는 문관들로 하여금 겸직토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은 매일 편전에 나가 정무를 처리한 다음에는 곧바로 경연으로 자리를 옮겼다. 태종을 모시고 밖으로 출타하는 특수한 일 외에는 잠시도 폐강을 하지 않았다. 경서는 반드시 100번 이상을 읽었고 자사(子史)는 반드시 20번 이상을 읽었다. 심지어는 상중에도 경연을 폐지하는 일은 없었다.

성종 때는 특진관 제도를 마련하였고 효종 때는 초야에 묻혀있다가 발탁되어 올라온 인물들에 대해 경연관을 겸직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경연에 참여한 역대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송시열 등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은 거의 모두 경연관 출신이었다. 이황은 지경연사, 성혼은 경연 참찬관, 송시열은 영경연사로 참여했다. 경연은 초야에 묻혀있는 숨은 실력자를 파격적으로 발탁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율곡이 경연에 참여했을 때 쓴 일기를 정리한 것이 '경연일기'이다.

중국에서는 1년에 두 번 춘추로 나누어 3개월씩 경연을 개강했지만 조선에서는 1년 사시사철 매월 개강을 했다.

중국에서는 한 달에 세 번 2일, 12일, 22일 경연을 열었지만 조선에서는 매일 경연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한번 강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침에 조강, 점심에 주강, 저녁에 석강 하루 3차례 강의를 열었다.

조선의 왕들은 삼복더위에도 경연을 휴강하는 일은 없었다. 부모의 상중에도 경연은 중단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국가에 변란이 발생하여 국문을 하는 중에도 경연은 폐강하지 않았다.

이런 완벽한 제왕학 교육제도 속에서 조선의 왕들은 연산군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현의 경전과 고대의 역사를 배우는 가운데 몸과 마음이 수양되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제가, 치국, 평천하가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모셔다가 그들이 평생 공부한 정수를 물려받는 가운데 조선의 왕들은 인격이 도야되고 경륜이 쌓여갔다.

경서와 역사서, 특히 '대학연의', '정관정요', '자치통감', '동국통감', '성학집요' 등과 같은 제왕학 교재를 바탕으로 요즘 입시생들보다 더 치열하게 제왕학을 공부했던 조선의 왕들은 경연제도를 통해 왕다운 왕으로 성장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500년 원동력은 선진적인 경연 제도에 있었다

중국의 왕조는 한, 당 이후 송, 원, 명, 청이 모두 300년을 넘기지 못했다.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은 5년 임기도 제대로 다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낙마하거나 감옥에 가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는 정권을 세습하면서 500년 동안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그 가장 중요한 이유가 선진적인 제왕학 교육제도인 경연에 있었다고 본다.

조선의 다른 모든 정부 기구는 신하가 최고 권력자인 임금을 받드는 하부기관이었다. 그러나 경연은 달랐다. 임금이 스승을 모시고 배우는 사부(師傅)의 기관이었다.

우리는 조선의 왕들은 여유와 낭만을 즐기며 한평생 호화로운 삶을 살다가 갔을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학덕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평생 제왕학을 공부하며 수업하는 학생으로서의 삶을 영위한 것이 조선의 왕이었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경연이었다.

조선왕조가 500년을 끄떡없이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선진적인 경연제도에 있었다고 하겠다.

◆경연(經筵) 제도 부활로 대통령 중심제 결함 보완하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후에 '맹자'를 배웠는데 그가 일찍이 '맹자'를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일이 있다. 쉽게 정권을 손에 쥔 윤석열 대통령도 집권 후 제왕학 수업에 충실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고난의 길을 걷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 현직 한국 대통령들의 비참한 말로를 보면서 대통령 중심제의 한계와 그 보완이 절실함을 느낀다.

지금 1987년 체제인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개헌논의가 활발하다. 그러나 맹자는 "착한 마음만으로 좋은 정치를 할 수 없고 좋은 제도만으로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라고 잘라 말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 놓은들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함량 미달이면 좋은 정치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실 안에 군주시대의 경연제도를 민주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대통령학 교육 특별기구를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